영국 박물관

by 히다이드

영국 박물관이야말로 내가 런던에 온 이유였다. 만약 영국 박물관과 런던 안의 다른 모든 명소들을 합한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고민 끝에 영국박물관을 택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EBS 채널의 ‘대영박물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재밌게 봤었다.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대 유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내레이터의 지적이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내가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었다. 그 때 TV로 봤던 유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영국 박물관은 고대 세계로 나를 데려갈 시간여행의 관문이었다.


영국 박물관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 아침, 서둘러서 숙소를 나섰다. 그날은 유독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러서 내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게 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박물관의 가장 큰 장점은 무료라는 것이다. 기부를 하는 곳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관람하기로 했다. 런던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매일 영국박물관을 찾아올 계획이었는데 이집트와 그리스, 중동 지방의 모든 유물들을 보는 게 목표였다. 특히 고대 이집트를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사막에 세워진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나일 강변의 신전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상하는 건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집트 관부터 찾아갔는데 이집트 관에서 제일 먼저 마주친 게 바로 그 유명한 ‘로제타석’이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의 실마리가 된 그 유명한 고고학적 유물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작은 검은색 바위였다. 처음 발견했던 군인들이 요새의 주춧돌로 쓰려고 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한 바위 덩어리였다. 그 돌 한쪽에 빽빽하게 써진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를 보며 사막에서 바위에 글을 새기고 있는 석공이 생각났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하며 글자를 새기는 석공이 자신이 글귀를 새겨 넣은 바위가 몇 천 년 후에 온 세계의 주목을 받는 유물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어딘가에 자기 이름이라도 새겨놨을 것이다. 몇 천 년 전에 새겨진 글씨가 그 긴 시간 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긴 시간 동안 묻혀있다 갑자기 등장해 고대 이집트의 비밀을 밝히는 게 이 바윗돌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로제타석을 뒤로하고 이집트 관에 있던 다른 거대한 석상들과 조각들, 미라들을 둘러봤는데 눈앞에서 돌을 깎아내고 색을 칠하고, 상형문자를 기록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횃불 아래서 정성스레 색을 입힌 후에 몇 천 년 동안 지속될 어둠 속으로 들이는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하루 종일 박물관에 있었지만 유물마다 오디오 해설을 들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이집트 관도 다 돌아보지 못하고 박물관을 나와야 했다. 그 뒤로 세 번 정도 더 영국 박물관에 갔었는데, 페르시아와 아시리아, 그리스, 로마의 유물들을 거의 다 돌아볼 수 있었다. TV 로만 보던 고대 유물들과 마주했던 시간은 이 여행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며칠간 유물들을 보다 보니 지역마다 특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집트의 유물들에는 사후 세계를 추구하는 신비함이 묻어 있었고, 페르시아와 아시리아는 남성미가 넘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근육질의 남자들이 전차를 타고 사자 사냥을 하는 부조들이 많았는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공성전과 같은 전쟁의 모습을 묘사한 부조도 많았다. 왕들의 주요 업적을 부조로 남겼던 것 같은데, 그 왕이 어떤 전쟁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다. 돌판 안에는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 패배자들에 대한 우월감과 적개심, 조롱과 경멸이 담겨 있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전쟁을 치르며 보고 느끼고 남기고자 했던 감정의 흔적들이 몇 천 년을 가로질러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스의 유물들은 아름다웠다. 조각들의 선이 너무 고왔고 전부 어떤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았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을 보는데 돌을 깎아서 옷자락이 흘러내리는 것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표현해 냈다는 게 그저 대단할 뿐이었다. 예술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조각들 하나하나를 뭔가에 홀린 듯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예술가들이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기독교와 관련한 역사적 유물들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조공을 바치러 온 북이스라엘의 왕이 아시리아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이나, 유다의 라기스 성이 아시리아 군에게 함락당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가 기억에 남는다. 성경의 흔적을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며칠 동안 박물관을 드나들었지만 내가 둘러본 부분은 박물관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만큼 영국 박물관의 규모가 컸고 소장품의 질도 우수했다. 그 소장품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복잡한 문제들은 뒤로 하고 귀한 역사적 유물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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