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줄을 잡을 때 저녁에 뭐 할지를 정하는 게 난감했다. 술을 안 마시다 보니 딱히 할 게 없었다. 맥주라도 마시면 펍에서 병맥주 하나를 시켜놓고 옆에 앉은 현지인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려고 했을 텐데, 술도 못 마시는 데다 현지인과 자유롭게 대화할 만큼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괜히 취한 사람들 속에서 어리바리 행동하다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목적지도 없이 계속 밤거리를 배회할 수는 없고 좀 더 의미 있게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걸 찾아봤는데 런던이 뮤지컬로 유명하다는 걸 알아냈다.
몇 년 전 회사를 다닐 때 한국에서 ‘위키드’라는 뮤지컬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때 공연을 못 본 게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는데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런던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티켓 부스가 있는 내셔널 갤러리 근처 레스터 광장까지 걸어가면서 내심 표를 구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표가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30분, 버킹엄 궁전에서 2 km 정도 떨어진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바람은 약간 쌀쌀했지만 하늘도 맑고 오후의 햇빛이 참 좋았다. 멀리 극장 앞 대로변에 사람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극장에 들어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줄을 선 지 얼마 안 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미 도착한 사람들로 극장 안이 시끌벅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볼 때가 생각났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이 날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 안의 사람들은 복장도 자유로웠고 극장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좋아 보였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봤던 진중함이나 이 날 본 사람들의 자유분방함이나 다 좋아 보였고, 이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공연이 시작하자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막 없이 보는 건 확실히 무리라는 게 느껴졌다. 뮤지컬에 나오는 음악이 좋아서 2 시간 정도 좋은 음악을 듣다 나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자 마린스키 극장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들 누군가와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는데 일행이 없는 나는 혼자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연인, 친구, 가족들과 어울려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지구 반대편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라는 사실이 새삼 외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걷고 있을 때 앞에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게 보였다. 한국 대사관이었다. 태극기가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른다. 늦은 밤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사관 직원들도 퇴근한 것처럼 보였다. 불이 켜진 1층 홀에 거북선 모형이 보였는데, 밖에서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홀 안의 거북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멈춰 선 채 대사관 안을 들여다보다 다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