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서울 하늘 아래 부모님 그늘 밑에서 스물일곱 해를 살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외를 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해결했기에 ‘경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했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엄마 명의의 전셋집에서 살면서 통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즉 월세에 대한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활이었다. 진정한 독립은 스물여덟 살, 부산의 한 대안학교에 취직한 시점부터 이루어졌다.
엄마는 식당을 경영하셨지만 혼자 자식 셋을 키우셨기에 따로 돈을 모을 여력이 없었다. 큰딸이 독립해 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월세 보증금 천만 원을 빌려줄 수 없을 정도였다. 나의 독립 자금은 엄마의 절친, 이 여사님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나는 이 여사님께 빌린 1천만 원으로 부산 온천장 근처 신축 원룸을 계약했다. 난생처음 부동산 소파에 앉아 등기부 등본을 확인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떨리면서도 약간은 신이 났다. ‘드디어 독립했구나, 매월 20만 원을 내는 조건으로.’
이 여사님은 내게 무이자로 1천만 원을 빌려주셨는데, 당시의 나는 그 돈을 앞으로 어떻게 갚아 나갈지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20대 초반부터 돈을 벌어 이미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면 그 1천만 원에 대해 이처럼 흐리멍덩할 수는 없다. 자력으로 학비와 용돈을 벌지 않으면 대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던 고단함, 그 고단함을 위로받고자 딴에는 자신을 ‘독립적인 인간’이라 포장하지 않았나 싶다. 뭐라도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나의 ‘가오’, 그 가오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퇴근 후 장을 보고, 밥을 지어 먹고, 세탁기 없이 손빨래를 하면서 생활인의 감각이 조금씩 몸에 붙기 시작했다. 진정 ‘독립한 인간’이 되어 작은 방에 살았지만, 그 방 안에 머무를 수 있어서 좋았다. 퇴근 후 오롯이 시간과 공간을 홀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온천장 원룸 시절은 좋은 날들이었다. 바로 앞 건물에 막혀 전망이라고 할 것은 전혀 없었지만.
결혼하면서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신혼집 전망이 어땠는지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 해도 좀처럼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 나와 남편은 주중에는 각자의 일로 정신없이 바빴고, 주말이면 거의 매주 시댁을 다녀왔다. 실제로 낮에 집에 머물렀던 적이 별로 없었다. 남동생의 급작스러운 소천 이후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 옆에 있겠다고, 엄마가 살던 아파트의 같은 층에 전셋집을 얻었다. 그때는 첫아이를 키우느라 밖을 내다 볼 새가 없었다.
2006년, 내 집을 마련하겠답시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작은 아파트를 샀다. 집은 4층이었다. 봄이 되면 베란다 통창 아래로 키 큰 버드나무에 여린 잎이 달리는 것이 보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버드나뭇가지를 보고 있으면 모종의 평화가 강림한 듯했다. 두 아이는 통창에 붙어 서서 응봉교 위를 지나다니는 레미콘을 구경했다. 문제는 밤이었다. 두 아이가 잠들고 침묵의 시간이 찾아와도 내 귀는 쉴 수가 없었다. 다리 위를 지나다니는 차량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강력했다.
비 안 맞고 등 눕힐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족한데, 감사는 사라져 버리고 불만족은 끝도 없어 부끄러운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주생활 조건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깨닫기 어려운, 삶의 면면을 발견해가는 하루를, 오늘도 살고 있다.
(사진 : 원룸 시절, 학생들과 체험 학습 중 바닷가에서 스케치. 밖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는 좋은 방법.)
다음 주, 전망 좋은 집(3)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