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가죽신

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by 박쥐마담

비싼 물건은 비싸서 귀하게 다루고, 싼 물건은 쉽게 낡으니 비싼 물건보다 더 귀하게 다루지만, 구두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일정 기간 신다가 버리게 된다. 내 옷장에는 십여 년 이상 된 옷들이 수두룩하고 심지어 외할머니가 쓰시던 이브닝 백도 있지만 구두 중에는 요즘 말로 ‘장수템’이 드물다. 드물다는 말은 전혀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내 집 신발장에는 20년이 넘도록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꺼내 신는 신발이 있다. 가죽신이다.


대학생 때 큰외숙모님께 선물 받은 가죽신은 말 그대로 두툼한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뾰족한 구두 앞코에 매료되었던 시절, 구두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디자인의 신발이었다. 색깔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국적인 똥색 보트랄까. 다행히 큰외숙모님께 직접 받지 않고 엄마에게 전달받아서 감사 인사를 쥐어짤 필요는 없었다. 엄마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가죽 신발의 매력은 시간이 말해준다고. 물론, 그 말씀은 귓등으로 들었다.


당시의 나는 캐주얼보다 정장을 선호했다. 블레이저나 트렌치코트를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구두로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으며 나는 소리, 그 경쾌한 소리가 좋았다. 그 소리는 내가 살아있음을, 걷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아마도 20대의 젊음이 만든 자의식 과잉 상태의 효과음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그 소리가 타인을 짜증 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30대로 진입했고, 40대에는 구두굽 위에 버티고 서 있을 체력이 없어졌다.언제부턴가 몸에 꽉 맞는 옷을 입지 않게 되면서 무거운 가방도 장롱 속에서 동면에 들어가게 되고, 동네 벼룩시장에서 건진 7센티미터 굽이 달린 펌프스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내 한 몸 추스를 기운이 부족해 헉헉대니, 최대한 편한 차림을 하고자 하는, 본능에 가까운 선택이다.


조금 겸손해진 몸과 마음으로 봄과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계절이면 가죽신을 신는다. 엄마 말씀대로, 가죽 표면에는 시간이 남긴 흔적이 생겼다. 새 물건은 낡고, 낡으면 초라해지기 마련인데, 이 신은 그렇지 않다. 주름살과 은발이 더해질수록 깊은 매력을 풍기는 노배우 같다. 밑바닥도 가죽이라 고무창을 한번 덧대었을 뿐, 형태는 온전하다. 특히, 내 견문이 넓어진 이후로는 고대의 신발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셀 수 없는 날들을 걷고 또 걸어온 사람들의 발자취, 그 큰 흐름에 맞추어 나도 걷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사소한 것들로 웃었다 울었다 할 필요가 없다. 그 길에 신적 존재와 동행함을 믿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이 가죽신을 내 생의 끝날까지 신고 싶다. 비싼 삼베로 지은 수의는 전부터 입고 싶지 않았으므로, 결혼식 폐백에 입었던 한복,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혀달라고 할 생각인데, 거기에 이 가죽신을 신겨 달라고 해야겠다. 요즘 ‘패션 피플’들은 정장에 운동화도 거침없이 신던데, 천국 문 앞에서 ‘패션 피플’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