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 두면 힘이 된다 - 둔필승총
여덟 살 막내가 태권도장을 다닌 지 32개월이 되었다. 햇수로 3년 째니 적지 않은 기간이다. 계산해보니 돈도 꽤 들었다. 2품으로 승단하고 검은 띠를 받은 날, 지나가던 동네 형들이 먼저 알아봤다. “(쟤 어려 보이는데) 검은 띠다.” 막내가 흰 띠에서 검은 띠로 거듭난 비결은 오직 하나다. 집에서 애 셋 돌보던 엄마가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년 전, 막내는 동네 구립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원장님과 선생님들도 좋고 산 위에 있어 미세먼지가 없는 날은 성곽길을 산책할 수 있는, 나름 친환경적인 곳이었다. 어린이집이 ‘산 위’에 있어 퇴근하고 아이를 데리러 그 ‘산 위’로 올라갔다가는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짓고 먹고 치운 뒤 딱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각이라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막내를 ‘산 위’에서 안전하게 데리고 올 분은, 전국의 유치초등생 자녀를 둔 부모의 픽업 대리인으로 이미 맹활약 중이신 태권도장 사범님이었다. 사범님 덕분에 막내는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고, 나도 계속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엄마, 난 언제까지 태권도 해? 4품까지 따면 끝이야?” 어디 보자. 내년에는 방과 후 돌봄교실에 네 시 반까지 있다가 사범님과 태권도장에 와서 운동하고 집에 오면 되지. 그럼 넌 3품이 되겠지. 내후년에는 3학년이니 돌봄 교실에 있을 수가 없겠지. 학교에 유휴 교실이 없어 3학년은 돌봄 교실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럼 어쩌나. 도서관에서 한 시간 책 읽다가 태권도장에 가면 되겠네. 그럼 집에는 4시에 오고, 4품이 되네. “그래. 4품까진 따자.”
승단 심사는 강남 국기원에서 하지만 부모들이 다 따라가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막내가 다니는 태권도장에서는 크리스마스 즈음 ‘공개심사’라는 것을 한다. 막내의 우는소리는 한 달 전부터 잦아졌다. 공개심사가 싫단다. 왜 싫으냐고 물어보니 송판 격파 때문이란다. 한 번에 안 깨지면 어떡하냔다. 그럼 두 번에 깨면 되지. 두 번에도 안 깨지면 어떡하냔다. 그럼 세 번에 깨면 되지. 지난번에 보니까 너보다 훨씬 큰 형도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 깨서 박수받더라. 그런 말은 막내에 귀에 들릴 수가 없었다. 이미 좀비를 능가하는 ‘송판의 공포’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학기 말 시험지 채점과 성적 입력에 지친 엄마에게 한숨과 징징의 선물을 수시로 안겨주곤 했다. 울기 직전까지 차오른 공포는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게 선물 안 준다”로 달랠 수밖에. 남편에게 좀 달래보라고 했더니, 원래 송판을 두 동강 낸 다음에 살짝 붙여놓는 거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으이그. 남편 입술을 살짝 붙여놓고 싶었다.
어제저녁, 태권도장에서 열린 공개 심사에서 막내는 돌개차기인지 돌려차기인지 모를 발차기로 송판을 가격, 경쾌한 ‘쩍’ 소리가 나게 격파했다. 심사가 끝나고 선물 추첨으로 팽이를 받아 한껏 기분이 좋아져 귀가한 막내에게 물었다. “넌 그렇게 잘 격파할 거였는데, 걱정은 왜 했던 거야?” “송판이 그렇게 얇을 줄 몰랐지.” 공개 심사는 1년에 한 번 하니, 1년이 흐르는 사이에 막내 기억에 저장된 송판 두께는 슬금슬금 불어났나 보다. 내년 이맘때 그 공포는 또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원래 주관적, 선택적이니까.
이참에 알려줘야겠다. 네가 격파한 송판은 두께 1.2 밀리미터짜리의 성인용 격파 송판이 아니라는 것, 재 보진 않았지만 0.4 혹은 0.6 밀리미터 송판이라는 것을. 그 두께만큼의 종이 뭉치보다 송판이 훨씬 더 잘 깨진다는 것을. 섣부른 격려나 위로 대신 사실을 알려주면 ‘그럴 줄 몰랐지’의 문 앞을 떠나 번지수 맞는 문을 제대로 열게 된다는 것을. 혹 잘 안 열리면 그동안 연마한 발차기를 쓰면 된다는 것을. 올해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새해에도 정확한 사실을 따뜻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지인들이 천사처럼 찾아오기를 손 모아 빌어본다. 나와 가족, 친구들을 포함해 작은 두려움과 큰 공포에 맞서 싸울 우리 모두에게.
한해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