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친구 따라 분당 간다

by 박쥐마담

암일 수도 있으니까 빨리 검사를 받으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니까. 3년 전에는 늑대가 정말 나타난 줄 알고 엄청 쫄았지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지레 겁을 먹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면서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짜증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주말에 연달아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안 유명한 작가에게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북토크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타로 잡혔다. 8차선 도로 가득히 늑대가 떼거리로 몰려와도 나는 몰라요, 모르쇠를 댈 수밖에. 신경을 끄고 행사를 잘 마치는 데만 집중했다. 다행히 일정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월요일 아침,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전에 다녔던 대학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9시부터 통화를 시도했는데 연결이 쉽지 않았다. 녹음된 안내 멘트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월요일 아침이라서 쉽지 않은 건가?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6분 만에 예약을 담당하는 직원의 인사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직원에게 건강 검진 센터에서 들은 결과를 말하고 정밀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예약을 잡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 나는 이 대학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환자라는 거다. “저는 초진이 아니에요. 3년 전에 이 병원 유방 센터 양성 종양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았거든요?” 그래도 안 된단다. 암 확진을 받지 않은 상태로는 의사를 만날 수 없다고 했다. 3년 사이에 유방암 환자가 급증하기라도 한 걸까? 암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병원에 전화했는데 외려 내게 암이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다니. 늑대들의 비웃음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리는 듯했다.


국가암정보센터에 따르면 2020년 한 해에 247,952명이 암 진단을 받았다.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발생한 암은 갑상샘암이지만 성별로 나누면 순위가 바뀐다. 남성은 폐암이고 여성은 유방암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24,806명의 여성이 유방암 환자가 되었다(드물지만 남성도 유방암에 걸린다. 같은 해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남성 환자는 117명이다.) 매년 2만 5천여 명이라니, 서울 잠실 야구장 관중석을 꽉 채울 수 있는 숫자다. 게다가 내가 진료를 받으려는 대학 병원은 국내 3차 병원(상급종합병원) 중에서도 소위 ‘빅5’ 안에 드는 곳이라, 진료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든다. 쿠오바디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려나?


친구 L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L과 초등학교에서 만나 3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오고 있는데, 그녀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L은 조사하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L과 나는 또 다른 친구 P와 셋이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7박 9일짜리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확정하려고 모였는데, L이 숙소 후보지 목록을 꺼내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목록에 오른 호텔, 게스트하우스, 민박 등은 모두 합쳐서 50군데가 넘었다. 우리는 L이 뽑은 목록을 붙잡고 숙소 하나하나의 위치와 가격, 컨디션에 평점까지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혓바닥을 놀릴 수는 없었다. L은 우리에게 50여 개의 숙소를 내놓기 위해 수백 개의 숙소를 검색했을 테니까. L이 마음만 먹으면 못 찾아낼 정보가 없을 것이다. 국정원이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게 안타깝다.


L은 지난여름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나처럼 유방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다. 조사+비교+분석의 달인답게 L은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부터 빅5 병원까지 대상에 올리고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특히 L은 맘모톰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병원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맘모톰(mammotome)은 데비코어 메디컬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진공 흡인 유방 생검기이다. 이 기구를 이용하면 전신마취나 피부 절개를 하지 않고 유방 조직의 일부를 얻거나 병변을 제거할 수 있다. 입원할 필요가 없고 찜찜한 혹도 깔끔하게 한 방에 제거할 수 있고 흉터도 거의 남지 않으니 환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시술인 듯 보이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그렇지가 않다.


유방에 혹이 있다고 하면 환자는 걱정되고 불안하다. 맘모톰으로 혹만 제거하면 다 해결될 것 같아서 혹할 수 있지만, 맘모톰으로 제거한 혹이 병리학 검사 소견을 거쳐 최종적으로 암으로 판명되면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격이 된다. 암세포는 혹의 주변 조직에도 잔존하므로 다시 피부 절개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이 아닌 양성 혹이라면 굳이 제거할 필요가 없다. 현재는 양성이지만 악성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혹이라면 맘모톰으로 제거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는데, 이 판단은 의사의 실력과 양심에 맡겨야 한다. 결정적으로 맘모톰 시술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맘모톰 시술의 최저 가격은 9만 원이었고 최고 가격은 3천만 원이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엿장수 맘대로…인가? 환자가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몇백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신뢰할 만한 의사와 병원을 찾을 수 있으려나.


L은 그 어려운 걸 거뜬히 해냈다. 나는 L이 선택한 병원이 어디인지 묻기만 했다.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L과 같은 친구가 있으면 늑대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어도 저리 꺼지라고 말할 용기가 생긴다. 친구 따라 강남, 아니 분당의 W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나는 L과 이탈리아 여행을 가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 L이 숙소를 100군데 검토하자고 해도, 군말 없이 따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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