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의 W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속전속결이로군. 바로 예약을 잡았다. 병원에 올 때 검진 기록과 유방 엑스레이와 초음파 CD 영상 복사본을 챙겨 오라고 해서 후다닥 B 건강검진 센터에 들렀다. 준비는 끝났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른다. 평소처럼 지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분당은 멀고도 가까운 곳이다. W 병원은 집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있지만 광역급행 버스를 이용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집을 나선 지 1시간 15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어서 을씨년스러웠다. 예약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여유 있게 나섰더니 너무 빨리 왔다.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마음을 달랠까 싶어서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면서 친구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나는 편지에 끝인사로 “당분간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말 것.”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아프지 말라니,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언젠가 아프게 되고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말고 최대한 나중에 그렇게 되자는 뜻에서, 친구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주문처럼 쓰곤 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편지 말미에 이 문장을 썼다. 친구에게 말하는 모양새였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W 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차분하고 친절했다. 유방 확대 촬영과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했다. 검사를 하고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모니터로 방금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의사가 가리키는 부분을 보니 검은 바탕에 하얀 점들이 모여 있었다. 그 부분만 잘라서 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나를 이 자리에 데려다 놓은 별, 미세 석회였다.
의사는 석회들의 모양이 좋지 않아서 조직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미세 석회가 도대체 뭐길래? 작은 돌 쪼가리 아닌가?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에 따르면, 유방의 미세 석회는 칼슘 성분이 침착되어 단단해진 것이라고 한다. 미세 석회 자체는 암이 아니지만 미세 석회들이 있으면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의사는 미세 석회가 점이나 마찬가지여서 조직을 얻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마치 해변에서 모래알 한 알갱이를 줍는 거라나.
그런데 미세 석회로 끝이 아니었다. 의사는 좀 더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분이 한 군데 더 있다고 했다. 의사는 종이에 원을 그리고 원의 한가운데에 점을 찍었다. 점이 유두인 모양이었다. 유두를 기준점으로 6시 방향과 10시 방향에 점을 하나씩 더 찍었다. 10시 방향은 미세 석회인 것 같은데 6시 방향은 뭐지? 의사는 모니터에 초음파 영상을 띄웠다. 가로로 퍼진 타원형의 혹이 보였다.
“모양만 봤을 때는 암으로 보이는데, 조직 검사를 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암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너무나 상투적이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느낌을 경험하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섰겠지. 아무런 증상도 통증도 없는데 내 몸에 암이 있을 수 있다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의사는 운이 좋으면 이 혹이 오랜 염증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세 석회화와 혹 모두 암인 경우였다. 이렇게 되면 수술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고 했다. 두 군데 모두 조직 검사가 필요하므로 오늘은 의사가 암으로 추정하는 혹을, 일주일 뒤에는 미세 석회화 부위를 검사하기로 했다.
검사실에 누웠다. 검사할 준비를 마치자 의사가 들어와 어떤 식으로 조직 검사(총 생검)를 할지 설명했다. 국소 마취를 하고 유방에 긴 바늘을 삽입해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는데, 이때 총소리처럼 소리가 나니 놀라지 말라고 했다. 이미 암이라는 단어에 충분히 놀라서 총소리, 아니 대포 소리가 나도 덤덤할 것 같았다. 의사는 초음파 모니터를 보면서 바늘을 삽입했다. 네댓 번쯤 탕탕 소리가 들렸다. 백지영의 노래처럼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는 아니었다. 정신이 너무 말짱해서 불만이었다.
지혈을 하고 검사한 부위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검사 결과는 3,4일 뒤에 문자로 알려 준다고 했다. 병원을 나서자 울적한 기분이 확 밀려왔다. 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저녁에 여동생과 유홍준 작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완간 기념 강연을 들으러 가기로 했는데, 취소를 하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충분히 고통스러웠으니 조금이라도 행복하자.
유홍준 작가님의 강연은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님의 구수한 고품격 입담에 반나절 내내 쌓였던 긴장과 근심이 싹 물러갔다.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에 덜컹거렸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식이 다양할 텐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알면 엉망진창인 날에도 깨알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겨우 깨알이라고? 그 깨알이 없었으면 총 맞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유홍준 작가님이 강연에서 꼭 하시는 말씀이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이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백제 예술의 아름다움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서 따 온 말이다. 인생도 검이불루하고 화이불치할 수 있을까? 오늘까지 살면서 화이불치는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이목구비가 수려해야 화려하든 말든 할 텐데, 그런 외모를 타고나지 않았으므로 땡이다. 하지만 검이불루는 꽤 구미가 당긴다. 돈이 많으면서 검소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돈이 별로 없으니 검소할 수밖에 없고, 누추하지만 않으면 된다. 내 몸에 암세포가 있든 없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 뒤에 문자를 받았다. 조직 검사 결과는 섬유낭종성 변화로 나왔다. 암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약간의 운은 허락되는구나. 낯선 암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