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대학 병원에 전화했을 때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암 진단을 받아야만 입장을 허락한다는 설명에 환자들의 문전성시가 내포된 줄 몰랐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암 환자가 되었으니 문 좀 열어 달라고 하면 어서 들어오시라는 말은 못 들어도 순서대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예약 전쟁이었다.
나는 1년 전부터 잔나비를 덕질하고 있다. 어렸을 때 가수나 밴드, 그룹을 좋아했던 적은 있지만 팬카페에 가입을 한 건 처음이었다. 거의 생애 최초의 덕질인 셈이어서 나날이 황홀하고 설레었다. 잔나비의 음악에 빠져들수록 음원과 영상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잔나비가 참여하는 페스티벌에 가서 직접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건실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티켓팅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대학 수강 신청을 수기로 했던 옛날 사람은 왜 티켓팅을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라고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티켓 예매 사이트의 서버 시간 창을 열고 예매 시각에 맞춰 초 단위로 광클릭을 하는 세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매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 자체부터 쉽지 않았고, 운 좋게 접속해도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빛보다 빠른 덕후들이 포도알이라 불리는 보라색 좌석을 낚아채 화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하얀 눈밭에서 몇 번 구르는 동안 오기가 생겼다. 내 비록 옛날 사람이라 이 세계에 적응하기 어렵지만 끝내 이루리라! 토끼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밤을 보낸 뒤 단독 콘서트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잔나비 덕분에 쌓은 예매 능력을 병원 예약에 쓰게 될 줄이야.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M 님은 반드시 오전 9시에 전화 연결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9시 5분을 넘어가면 전화 연결 자체가 잘 안 될 거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반드시 9시 정각에 1번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야 말리라. 심호흡을 하고 8시 50분에 안방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네이버 서버 시간 창을 열고 스마트폰 키패드에 병원 대표번호를 입력했다. 8시 59분부터 초록색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1초씩 지나가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00분 00초 정각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에 닿았다. 중추신경계와 손과 눈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진 순간, 익숙한 안내 멘트가 나오는가 싶더니 바로 직원과 연결이 되었다. 고마워요, 잔나비.
전화기 너머의 담당 직원에게 당당히 유방암을 진단받았노라 말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예매, 아니 예약 성공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 어려운 걸 한 번에 뚫었으니 날짜만 잡으면 된다. “몇 기로 진단을 받으셨어요?” 직원의 질문에 허를 찔렸다. 몇 기인지 알아야 하는 거였나? M 님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직원은 A, B, C교수님 중에서 B 교수님만 0기 환자부터 진료한다고 설명했다. “예약이 많이 밀려 있어요. 진료받으시려면 두 달 이상 기다리셔야 하는데, 잠깐만요. B 교수님은 이틀 뒤에 한 자리가 비어 있네요.”
엊저녁 M 님과 전화 통화를 할 때 나는 M 님이 어느 교수에게 수술을 받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술을 받은 교수는 어땠는지, 다른 교수들은 평이 어떤지도 물었다. 하지만 질문을 하면서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반신반의했다. 먼저 경험한 사람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다. 경험자는 나에게 예정된 미래를 이미 경험하고 과거로 흘려보낸 사람이다. 이 모든 과정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존재로 증명하기에 경험자의 목소리는 힘이 있다. 그러나 경험자는 자신의 경험에 갇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은 나의 경험과 비슷해 보이지만 같을 수 없고,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그와 내가 살아온 방식이 다른 만큼 차이가 난다. M 님에게 좋은 의사가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의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내 몸을 맡길 의사를 고르는 건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한 뒤에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 신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신중할 뿐, 다른 병원의 의료진까지 비교할 생각은 없었다. 암에 나의 모든 정성과 에너지를 다 쏟고 싶지 않았다. 암 환자가 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암이 나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건 싫었다.
나는 전화기 너머의 직원에게 0기 환자부터 진료하는 B 교수에게 진료를 받겠다고 했다. 내가 0기인지 아닌지는 몇 시간 뒤에 분당의 W 병원에 가면 알 테고, 0기가 맞으면 이틀 뒤에 대학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 나름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이 세계를 잘 모르지만 W 병원에서 예약을 잡아도 이보다 더 빨리 잡아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날 오후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분당의 W 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의 암이 0기일 것 같다고 했다. 그 말 외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암에 대해 더 말해줄 것은 없어 보였다. 나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의사가 할 말은 병원에서 보내준 7분 남짓의 동영상에 대부분 들어 있었다. 그 동영상에서 의사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병기를 알 수 없고, 큰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야 임상적 병기가 나오고, 최종적으로는 수술이 끝나고 첫 외래에서 병기가 확정된다고 설명했다. 내 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이 의사를 붙잡고 늘어질 게 아니라 대학 병원의 담당 교수를 만나야 한다.
의사는 상급 병원 예약을 잡아 드릴 건데 원하는 병원이 있으시냐고 물었다. 진료 예약은 그녀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선생님, 사실은 제가 오늘 아침에 집 근처 대학 병원에 전화를 했어요. 이틀 뒤에 진료 예약 자리가 하나 비어 있어서…” 그때 의사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참 잘하셨어요!” 난데없지만 진심 어린, 감정이 온통 드러난 칭찬이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의사는 어느 교수를 예약했냐고 물었고, 나는 B 교수라고 답했다. 의사는 B 교수님도 수술 잘하신다고, 수술 잘 받으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당황스럽고 쑥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어머, 나 잘했나 봐!
의사에게 잘했다는 말을 들으니 힘이 났다. 나는 힘이 필요했구나. 수술하기 전에 반드시 잔나비 콘서트에 한 번 더 가기로 마음먹었다.
- 분당의 W 병원은 빅 5 병원 중 네 곳과 진료 협약을 맺고 있었지만 내가 예약한 모 대학 병원과는 협약을 맺고 있지 않았다(대신에 모 대학 병원의 분원과 협약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진료를 받고 싶은 대학 병원을 먼저 정하고 그 대학 병원의 협력 병의원 중에서 검사받을 곳을 고르거나, 방문하려는 병원이 어느 대학 병원과 진료 협약을 맺고 있는지 미리 확인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