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를 또다시 보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초등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삼성전자에서 새로 출시한 컴퓨터 모델인 '매직스테이션'은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표현하는 '간지템'으로 받아들여졌다. 나 역시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겨우 구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어찌나 험난하던지. 어쩌면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이 200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물건이어서다. 현재 시점에서 200만 원으로도 고급 스펙의 데스크톱이나 맥북 프로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PC의 가격이 얼마나 비쌌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컴퓨터는 대부분 게임용으로 사용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마 게임을 그럴 줄 몰랐을 것이다. 컴퓨터를 사주면, 그걸로 공부도 하고 그럴 줄 아셨겠지. 어렵게 컴퓨터를 들이고 나서, 친구 형을 통하여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인 '동급생'을 접하기도 했는데, 게임을 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각설하고 PC를 구입하면서 게임 이외에 신세계를 경험했던 건 컴퓨터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심심이'와도 상당히 유사한데, 가상의 인격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대답만 반복하는 프로그램에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를 보면서 '인공지능을 통한 인격체 형성'의 최종 진화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이'처럼 정해진 물음에 똑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운영체제를 통해 인간과 같은 하나의 인격체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운영체제를 제작한 회사와 이를 갈망하는 사람들까지. 영화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고 쓸쓸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온전한' 내 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만다를 보면서 온전한 테오도르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러움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영화 도중에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만약 테오도르와 같은 상황이라면, 너는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그 물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사만다는 운영체제임에도 불구, 하나의 인격체처럼 표현되었지만, 중요한 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테오도르가 될 자신이 없다. 사만다의 감정은 한 인격체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정교한 알고리즘에 의해 짜인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8316명 혹은 641명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점에서 사만다는 '온전하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테오도르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머지않아 현실에서도, 우리는 영화 <그녀>처럼, 사만다를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웹·모바일 서비스는 '개인화'에 포커스를 두고 진화하고 있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역시 쌓여가는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갈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우리네 미래의 모습은 테오도르와 가깝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만다와 사랑할 자신이 없다. 사만다는 나만을 사랑할 것이 아니기에. 어쨌든, 나는 그렇다.
1. 스파이크 존즈의 색채를 이용한 미장센 기법과 특유의 내러티브는 단연 일품이다.
2. 배바지는 테오도르만 입는 걸로. 호아킨 피닉스라서 소화 가능한 옷(영화에서는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하는 장치로도 사용)
3. <500일의 썸머>의 톰과 <그녀>의 테오도르는 참 많이도 닮아있다.
- 카드 문구 카피라이터와 손 편지 대필가(둘 다 글 쓰는 사람)
- 이별을 겪었음(물론, 그 과정은 전혀 다르다.)
- 자신만의 확고한 패션 철학을 가지고 있음(톰의 스타일이 전형적인 비즈니스 캐주얼에 가깝다면, 테오도르는 색감 활용 및 하이 웨이스트가 돋보인다.)
- 톰과 테오도르 모두 LA에서 일하는 직장인(영화 <그녀>의 배경은 LA지만, 실제 촬영지는 상해)
- 톰과 테오도르 모두 보다 나은 내일이 다가올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