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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끝 Feb 25. 2018

내게 다가와 따뜻함을 전해준, 그

2016년 겨울, 세비야, 60분. 짧지만 강렬했던 그와의 만남이었다. 5년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과 추억을 잊을 수 없다. 프란시스코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서툼'에서 시작되었다. 그 서툼이, 그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해준 것 같아 스스로에게 고맙다는 마음도 든다. 그와의 만남은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하여 세비야에 도착한 여정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주일가량 바르셀로나에 묵고 있던 나는 세비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란시스코 할아버지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섯 시간 하고도 30분을 쉴 새 없이 달린 열차는 어느새 목적지인 세비야 산타후스타역에 멈췄다. 역의 플랫폼을 나와 대합실 주변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마그넷 두어 개를 들였다. 그러고서는 숙소로 가기 위하여 버스정류장으로 몸을 옮겼다. 정류장에 내걸린 노선안내판을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구글맵만 켜면, 목적지로 가기 위한 이동수단을 일일이 알 수 있다지만, 당시에는 구글맵이 익숙지 않은 데다 모바일 인터넷에 의존하지 않은 채 여정을 소화한 터라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여행 접근방식은 많은 시행착오를, 또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더 많은 거릴 걸어야 했고, 추가적으로 지불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 이처럼 어떤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 헤매는 내게 백발의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나의 행선지를 물어본 뒤 자신도 같은 방향으로 이동한다면서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설명하였다. 사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항상 여행지에서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를 가로막는 촉매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따뜻한 미소와 인자함을 보면서, 내가 스스로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동양에서 온 청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길을 찾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의 설명대로, 그와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그는 내게 이름을 물었다. 그는 "프란시스코"라고 말했다. 나의 이름을 말하자, 할아버지는 서툰 한국어로 내 이름을 을 반복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산타후스타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명소가 들어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버스 안에서 유리창 밖에 보이는 세비야 명소를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가이드처럼. 히랄다 탑, 황금탑, 알 카사르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주셔서 모든 걸 일일이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세비야에 대하여 하나하나를 알려주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났을까. 목적지인 정류장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나와 함께 내린 뒤, 호텔 앞까지 직접 안내해주기 시작하였다. 특히 골목을 지날 때마다 골목을 기억할 수 있도록 주변에 내걸린 골목명을 하나씩 불러주셨다. 주변을 드나들면서 헷갈리지 않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금세 눈앞에 하얀 외벽의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손을 흔들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말씀하시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께 연신 '그라시아스'를 외쳐댔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입에 머금으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1시간 남짓한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렇게 짧은 꿈처럼 끝이 났다. 사실 할아버지에게, 고마운 마음을 더 전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용기가 부족했다. 약간의 부채감을 안고 세비야에서 사흘간의 일정을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다. 아마 그와의 만남 덕분이었을 게다. 버스 안에서 할아버지가 알려준 명소를 둘러보는 내내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더 보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행지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가방 속에 작은 꾸러미를 챙기는 일을 매번 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할아버지가 내게 베푼 따뜻함을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부채감을 덜어내기 위한 마음에서다. 항상 지난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건 화려하고 멋진 건물을 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보다는, 할아버지처럼 따뜻한 사람들과의 시간들 덕분일 것이다.


사진=내게 온기 넘치는 시간을 가져다주었던 프란시스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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