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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01. 2023

산다는 건

팔월한가위에...

산다는 건 순간순간을 참아내는 일인가 봅니다. 팔월한가위 보름달이 구름이 지날 때마다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하며 보고 싶거든 기다리라 하네요. 현실인 듯 아닌듯한 하루를 보내고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나 그래도 잘 살아온 거지"하며 읊조려 봅니다. 홀로 나선 산책길에 보름달이 길동무가 되고, 숙명이라 여기며 살아온 날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으면서도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차례문제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가와 친정 등 결코 해 보이지 않는 관계로 인한 어려움과 불편함에 관한 글들이 올라옵니다. 반면에 별 어려움 없이 현실에 맞추어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계신 분들의 글도 있고요. 그런 글들을 보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별나라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그 별나라의 이야기 같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올해부터 추석명절은 산소에서 간소하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제공자는 바로 저입니다. 칠 남매의 맏며느리인 제가 최근 계속 몸이 성치 못하면서 집안행사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몸져 누은 것은 아니지만 세월 탓인지 집안행사를 하고 나면 매번 병이 나고, 따라주지 않는 체력 때문인지 몸도 야위어 가네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형제들이 모여 시류에도 따를 겸 그리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상님 모시기에 늘 진심인 곁님의 성정을 잘 알기에 그 결정을 마냥 좋아할 순 없었습니다.


저 역시 38년이란 세월 동안 마땅히 해야 하는 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왔기에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니 마음이 더 부산스러웠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벌써 일주일 전부터 배추김치와 물김치를 담그고, 송편과 식혜를 만들어 놓고, 본격적인 장보기를 했습니다. 메모를 해서 장을 푸짐하게 봐와도 또 빠진 것이 있으면 몇 번씩 시장에 달려갔다 오기도 했지요.  그래도 젊어서인지 힘들다가도 하룻밤 자고 나면 거뜬해지고 전쟁터에 나선 전사처럼 씩씩하게 명절을 치러내곤 했습니다.


소쿠리마다 전을 하나 가득 부쳐 놓고. 솜씨 만들어 놓았던 송편을 찌고, 명절음식들을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내었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요. 내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뭐라도 하고 싶어 나서려 하면 식구들이 난리입니다. 제발 하지 말라고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거냐고요.  일을 빼앗긴 것처럼 서운하고 허전하고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마저 들더군요.


그래도 식구들 밥은 먹어야 하기에 나물 몇 가지와 산소에 가져갈 산적을 준비하고 전을 부치려 했더니 아들이 그마저도 하겠다며 나서네요. 아들 고생시키느니 아무래도 전도 다음에는 사야 할 듯싶어요. 언제나 녹두와 깨, 햇콩이 들어가는 송편을 손으로 야무지게 빚어서 집에 오는 사람마다 바로 쪄주고 갈 때는 푸짐하게 싸주기도 했는데..... 모두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못하게 하니 어쩌나요. 사러 가야지요. 소문난 떡집에서 두 시간이나 줄을 서서 사가지고 왔습니다. 멥쌀 한 됫박만 불려서 빻아다가 조물조물 빗으면 될 것을 하면서도, 줄 선 보람인지 맛이 괜찮다 하니 송편 만들기도 이제 안녕인가 봅니다.




차가 밀리기 전에 가야 하므로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약소한 음식이지만 모두 챙겨야 하고, 외출복도 입어야 하니 다 같이 바쁩니다.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씻고 준비했던 곁님이 설거지를 하고,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하니 4형제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다행히 날씨도 적당하고 우리 예쁜 손녀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어 추석명절 분위기를 물씬 나게 합니다.

올 추석에는 아쉽게도 군에 간 막내 조카와  요리사인 조카만 못 오고 모두 참석하여 고맙고 흐뭇한 날이었습니다. 20여 명이 모이니 조상님들께서도 좋으셨겠지요. 그렇게 차례를 지내고 따스하게 먹이려고 아침에 구워온 산적과 다시 김을 올려 쪄온 송편도 다들 맛있게 먹어주네요. 아들이 부쳐온 전후식으로 과일 먹고 특별한 2023년의 추석날이었습니다.


차례가 끝나고 온 가족이 점심으로 맛있는 소갈비를 사 먹고 부모님이 계신 셋째, 네째네와 며느리까지 친정으로 보내고, 친정부모님이 모두 가신 둘째네와 우리는 근처 카페를 갔습니다. 그동안 큰엄마 고생하셨다며 조카들이 사주는 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조상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되었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어딘가에서 뚝딱 떨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의 뿌리는 아빠의 아빠이고 할아버지이시니 비록 변해가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은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다만 다음부터는 좀 더 너희들이 연휴를 활용하여 여행도 가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꼭 당일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날로 정하여 오도록 하겠다는 큰아빠의 말씀에 환호가 이어졌습니다. 산다는 게 다 이런 건가요. 바래 적 없었지만 내게도 이런 날이 오네요.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아이들을 위해서 특히 하나뿐인 가녀린 며느리를 위해서 고마운 일입니다. 때로는 힘든 시간일지라고  살아내다 보니 세월의 변화 앞에서 서서히 바뀌어지기도 합니다. 기다림에 시간이 있을지라도 때가 되면 다가오는 일도 있습니다.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더디더라도 좋은 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여전히 애쓰시는 K며느님들 그날이 님들에게도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2023년 팔월한가윗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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