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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09. 2023

오늘이 가장 젊은 날

물의 정원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아란 하늘빛이 흐르는 물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고, 옅은 바람에도 살랑이는 능수버들이 가을빛을 노래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에 비어있는 흔들 그네에 몸을 기대앉아 흔들리는 강물에 꾸덕해진 마음도 적셔보고, 스쳐가는 바람에 달아나버린 가을갬성을 잡아보려 헛손짓을 해봅니다. 매일매일 짧아져 가는 가을날이 아쉬워 지인들과 남양주에 있는 물의 정원 물길을 따라 가을나들이에 나섰습니다.


물의 정원답게 오른쪽으로는 북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강줄기를 따라 드넓은 황화코스모스와 분홍빛 코스모스 군락지가 탄성을 자아내며 눈호강을 시켜줍니다. 너나없이 카메라에 파랑, 노랑, 분홍 가을빛을 담느라 걸음은 더디기만 하고 예쁘다는 감탄사로는 부족한 듯 퐁당퐁당 꽃 속으로 들어가 사진으로 남기려는 여인들의 난데없는 웃음소리는, 꽃 속에 숨어있던 벌들을 깨워 춤을 추게 합니다.


어떻게 찍어도 예쁘고, 당당하게 브이를 하고, 이쁜 짓도 마다하지 않던 젊은 날에 언니들은 이제 요구사항이 많아졌습니다. 당기자마라! 멀리서 찍어라! 뒷모습, 옆모습만 찍어라! 세월 앞에서 늘어만 가는 주름에 언니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예민해지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못하니 찍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어때요. 날도 좋고, 물도 좋고, 꽃도 좋은 오늘 하루 몇 번 다녀간 두물머리, 세미원은 버려두고, 오직 물의 정원에서만 즐기기로 했으니 서두를 일이 없습니다.


실컷 웃고 포즈 취하느라 부산스러웠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힘없이 늘어진 능수버들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모두 말이 없어집니다. 흰머리는 늘어가고 몸은 예전 같지 않으니 흐르는 강물만 보아도 바람이 지나간 듯 시려워져 말없이 따스한 손을 꼭 잡아볼 뿐입니다. 그도 잠시 우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우아하게 커피도 한잔 하고, 실컷 놀다 가자는 목소리 큰 언니의 외침에 일시에 대동단결이 됩니다.


막둥이는 잽싸게 음식점 써치에 나서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농부밥상집을 향해 차를 몰았지요. 반드시 시골냄새가 나는 할머니 밥집이어야 한다는 언니들의 바람대로 푸짐한 한상이 차려져 나왔습니다. 맛깔나게 무쳐진 고춧잎에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감자조림, 방금 버무린 새빨간 배추겉절이, 새콤하니 짜지 않은 오가피순과 가지장아찌가 입맛을 돋우네요. 거기에 향기 가득한 미나리 전은 젓가락질을 바쁘게 하고, 오늘의 메인 메뉴로 적당히 구워진 숯불고기를 싱싱한 상추에 돌돌 말아 입에 넣으니 이곳이 극락인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짭조름한 시골된장찌개로 밥을 비벼먹으며 이것으로 모든 식사가 완벽하게 정리가 되나 싶었는데 후식으로 못난이 사과를 몇 알 주시는데 요것이 물건이네요. 보기와 다르게 새콤달콤 맛이 있으니 말입니다. 이래저래 오늘 나들이는 밥집까지 완전 대성공이었습니다.


혼자이어도 좋지만 때로는 지인들과 어울리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고, 산에 들에 핀 꽃들을 찾아다니며 꽃 같은 마음을 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홀로 세월을 쌓아가기보다는 가끔은 곁에서 하하 호호하며 교양 따윈 잠시 접어두고 입이 미어터지도록 쌈도 먹고, 너도나도 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정해진 것이 없는 나날들, 지금이 가장 젊은 날이고 예쁜 날이라며 지치지 않는 텐션에 업되어 따라다니다 집에 돌아오니, 그 고단함에 아침까지 아주 긴긴 단잠을 잤습니다.

그리 개운할 수가 없네요.

가을나들이 꼭 다녀오세요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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