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그곳에서 무작정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 등뒤에서 수군거리며 실패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 같아 견딜 수가없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작은 봇짐을 말아 쥐고 꿈을 잃어버린 작은 기차표 한 장에 내 인생을 의지한 채 쓸쓸히 대합실을 벗어났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눈 속에서흐려지고, 무거워진 머리로 책을 펼쳐 들었다. 책 속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외면하고 싶어서 다가오는 현실이 두려워서 피하고만 싶었다. 앞으로 다가올 답 없는 미래는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철없이 울고불고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을 잡아줄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제목도 모르는 펼쳐진 책위로 긴 목을 들이미는 하얀 뒷덜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길고 마른 그가 들꽃처럼 웃고 있었다.
'무슨 책인지 같이 볼 수 있을까요.'
곱게 땋았던 생머리는 가지런히 풀어놓고, 초록빛 사회인이 되어야 하기에 하얀 블라우스에 짧지 않은 스커트를 입은 앳된 소녀에게 그렇게 그는 다가왔다. 아마도 내 꼴을 지켜본 것일까? 그럼에도 선뜻 영문도 모른 채 다가온 그가 나에 불안했던 미래를 잠재우고 분홍빛 꽃잎 한 장을 내 가슴에 드리웠다. 아무도 몰래 다가온 설레임에 외로운 서울살이는 고운 편지지에 실려 멀리 있는 그에게 달려가곤 했다.
꿈을 잃었던 소녀의 무지갯빛 날개는 그에게 청춘을 노래하였으며, 꿈 많은 대학생과의 풋풋한 연애는 아주 가끔 캠퍼스에 낭만을 동경하게 하였다. 그런 그는 다음에 회계사가 되고 좋은 날들이 되면 고운 여자친구와 손잡고가고 싶은 곳이 봄날에 흩날리는 꽃잎수보다도 많다 했었지.
그런 그를 보내야 했다.
잊어야 했다.
붉은빛을 토해내던 그는 기약 없는 요양길에 오르고, 바다가 보이는 오두막에서 파도와 동무하며 그렇게 서로가 잊혀져야 했다.
가난했던 여고생은 다잡았던 꿈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며 어쩔 수 없이 도망치듯 떠나야 했었다. 그 슬픔만 가득 안고 상경하던기차 안에서 만난 이름도 얼굴도 잊혀진 분홍빛 꽃잎은 그렇게짧은 인연만을 남긴 채 훌쩍 떠나버렸다. 저 아득한 지난날에 추억 속으로.
마음이 고단한 날 고왔던 지난날들을 떠올려보며 피식 웃어보곤 합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그날에 감정들마저 주름지지는 않는가 봅니다. 70을 넘긴 한 언니의 말이 생각나네요. 아직도 죽기 전에 미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고요. 우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슬프게도 그 언니는 허리가 골절되어 몸져누워 있다네요. 풋풋한 연애도 사랑도 어여쁜 때가 있나 봅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는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꿈꾸신다면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