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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an 12. 2024

뒤늦은 고백

나의 소중한 사람들

따스한 봄볕이 교정에 살포시 내려앉던 날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교실밖 활동이다 보니 선생님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우셨는지 봄소품과 체육대회시에 명예교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혼자인 줄 알고 들어섰는데 연배 있어 보이는 어머니 한분이 계셨다. 뻘쭘이 서 있다 인사를 나누며 같은 학부모인 것을 알았고, 시간이 흐르며 나이도 같다는 것을 알고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에 화장끼 없는 얼굴, 펑퍼짐한 옷차림에 목소리까지 평범치 않은 그녀가 나와 동갑일 줄이야.


그렇게 맺어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63 빌딩으로 소풍을 다녀오고, 운동회함께 했다. 학년을 마치고도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수다를 떨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날은 늦은 밤까지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달빛, 별빛이 새벽빛에 꾸벅거리도록 눈물콧물을 짜내며 넉넉지 못한 나의 시집살이와 굴곡진 그녀의 인생사에 울고 었다.  씩씩하고 한 톤은 높은 허스키한 목소리. 그 이면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아픔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 그녀와 나는 진실에 우정을 켜켜이 쌓았고 그녀의  삶이 부디 평탄하기를 바라먼저 이사를 했다. 어느 날 그녀의 유난히 슬펐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혈육이라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며 덤덤하게 마음을 내려놓던 그녀.  시절 명문여고를 나온 명석한 두뇌임에도 배움을 이어가지 못한 채 자신을 품어준  분께서 가시는 날까지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그녀. 난 그녀의 그 아픔들지금도 헤아릴 수 없다. 그랬던 그녀와 이사를 하며 소통은 뜸해졌고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은 가끔씩 걸음 하던 서울행마저 막아버려 소원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 친구뿐이랴 15년을 살던 마당 깊은 집의 골목집 이웃들과의 거리도 멀어져만 갔다.




그러기 23년이 가기 전에 하루를 내어 전화를 돌렸던 것이다.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는 진이엄마, 아이고 고마워. 그냥 잘 살고 있지 뭐. 놀면 뭐 해. 마침 일자리가 있어 심심치 않게 하니 건강에도 좋고 할 만허네. 진이는 사십이 낼모렌디 시집도 안 가고 여행만 다니고 지혼자 신나게 잘 살고 있어.
인이엄마, 지겨워 내가 못살겠어.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지 힘들어 죽겠어. 인이아빠도 작년 한 해 동안 팔이 부러져 일도 못하고 고생만 했어. 인이는 공부만 해대고 앉았고. 벌써 몇 년째야.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속 터져.
슬이엄마, 잘 지내지. 잊지 않고 전화 줘서 고마워. 요즘은 서울에 반정도나 있나. 외국으로 지방으로 떠도느라 바쁘게 살고 있지. 이제 여행도 힘들고 조용한 지역으로 옮겨볼까 해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난 이런 그녀들에 안부를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무런 포장 없이 날것의 삶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우리들의 관계.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고 더 이상 멀어지고 싶지 않기에 이어가려 애쓰곤 한다. 윗집에서 하숙집을 하던 진이엄마는 여전히 쉬지 않고 일을 하며, 딸이 시집도 안 가고 여행만 다닌다며 걱정이고, 인이엄마는 치매에 파킨슨병까지 있는 시어머니 병시중에 녹초가 되어가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거기에 매번 떨어지는 시험을 몇 년째 보고 있는 딸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에 비해 동갑내기인 슬이엄마는 아이들 모두 출가시키고 여행 다니느라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다는 소식이다.


이외에도 몇몇 지인들과 통화를 하며 가끔은 이렇게라도 소통을 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했구나 싶었다. 이제 새로운 누구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추억을 만들고 정을 쌓아가기에는 쉽지가 않다. 이 집에서 10여 년을 살았지만 옆집에 사시는 분들과도 혹여 폐가 될까 싶어 짧게 눈인사 정도 나누거나, 문화센터에 가서 무엇을 배워도 그때뿐 함께했던 분들과 깊은 교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너무 많은 인연을 부담스러워하는 내 탓도 있겠지만 그저 이미 맺어진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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