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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Feb 28. 2024

할머니의 잔소리

평안한 날들을 꿈꿉니다

짧지 않은 설명절 연휴가 끝나고도 여행과 또 다른 일정으로 손자들과의 일상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기분도 상쾌하고 씩씩함으로 무장하며 손자들을 맞이했겠지요. 하지만 아침부터 달려들어 오며 훈이가 종알종알 형아의 비행(?)을 낱낱이 쏟아냅니다. 꼬맹이들도 이제 완벽히 내 손안에 들어와 질서가 잡히고 평온한 일상을 잘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듯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무엇이 또 우리 윤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요. 늘 밑바닥에 꾹꾹 누르고 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행여 다시 튀어 오를까 조바심 내던 일이 또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더 견뎌내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애써 희망고문을 하며 덮어두려 했습니다. "성조숙증"이란 것이 왜 이리 우리 윤이를 힘들게 할까요. 물론 그것이 핑계일런지는 명확히 알 길은 없지만 차라리 그 때문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지나갈 것이고 잘 이겨낼 테니까요.


그동안 잘 지내왔는데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은지, 할머니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울고불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이나 못 해야지요. 또 이유는 그럴싸합니다. 첫째, 할머니집에는 장난감도 없고 지루해서(딸에게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서). 그럼 나의 변명은 할머니집에서는 오전의 짧은 시간 안에 수학문제 풀기와 줄넘기를 하고 점심까지 먹고 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다 보니 그럴 수밖에요. 더구나 운동은 필수이기에 줄넘기뿐만 아니라 공놀이와 달리기도 추가했더니 움직이기 싫어하는 윤이의 심정은 이해할 만합니다. 둘째, 생각토론이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 저녁 7시 이후에 이루어지는 수업이니 그건 나와는 무관하지만 싫으면 하지 않는 건 어떨까 했더니 그것은 또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본인이 선택했음에도 하기 싫은 마음이 집고 올라온 것이겠지요.  셋째,  개학이 얼마 안 남아서. 이건 인정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집돌이인 아이들이 개학이 얼마 안 남았으니 속상할만합니다. 넷째. 핸드폰게임금지, 윤이 입장에서는 속상하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시력이 안 좋아져 안경을 해주었는데 쓰지도 않고, 어쩌다 게임을 하고 나면 눈놀림이 이상하여 금지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딸의 해명입니다. 다행히 금지시킨 후 괜찮아졌지만요. 다섯째, 아빠의 연차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사위는 연차를 방학에 쓰려고 미루어 두었기에 요즘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사위는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도,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딸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건 제 몫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역시 최대한 잔소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고 있지만, 2학년, 4학년이 되는 형제들 앞에서 마냥 천사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거늘 애초에 글러먹은 일입니다(강해지기로 작정하였거든요).




일하는 부모이다 보니 어느 정도 미안함에 대한 보상심리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위는 잘 몰라도 우리 딸 성격은 제가 더 잘 알겠지요. 안 봐도 뻔히 미친 듯이 열심히 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했을 것이고, 집에 돌아오면 오전에 할머니집에서 풀어 온 아이들 문제집을 채점했겠지요. 또 가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하고, 아침에 먹을 것들을 준비해 놓고는 맨 먼저 잠들어 버린다는군요. 아이들은 아빠가 책을 읽어서 재우거나 각자 알아서 잔다고 합니다. 딸은 어려서부터 잠도 많고 공무원시험 준비하면서 이석증이 기 때문에 무리해서도 안되고 잘 쉬어줘야 합니다.


그러니 더 뭐랄 수도 없고 이제 방학이 끝나면 해결될 일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틀이 잡혀서 즐겁게 방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이는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왜 그리 서운하고 속상하던지요. 연휴가 길어지고 집에서 마음대로 쉬는 날이 늘어나면서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윤이의 계속되는 불만은 이것저것 핑계도 많이 댔지만 명확합니다. 집에서 며칠 아빠와 있다 보니 아침부터 급하게 준비해서 할머니집에 갈 일도 없고, 느긋하게 그날 할 일을 한 가지씩 하다가 장난감 가지고 놀다 유튜브도 보면서 해도 되는데 할머니집을 오가다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맞벌이 부모를 둔 많은 아이들이 방학이 되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겠지요. 그래 무엇이 중하겠나 싶어 운동도 줄이고 윤이의 기분에 맞추려 최대한 노력했지만 기어이 저녁식탁 앞에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종일 매사에 꼬투리를 잡으며 쉼 없이 징징징.... 참는데도 한계가 있겠지요. 하물며 유튜브를 보며 밥을 먹겠다고 떼를 씁니다. 그동안은 식사시간만큼은 멈춰놓고 먹었는데 오늘따라 제 속을 긁습니다. 그럼 대신에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조건부 허락을 했지만 그것이 잘  될 리 가요. 급기야 "이럴 거면 먹지 마!" 큰소리가 나갔겠지요.


그제야 사태파악이 되었는지 슬그머니 티브이를 끄고 소리 없이 밥을 먹습니다. 다행히 다음날부터 평화가 조금씩 찾아오고는 있지만 사소한 일로 한차례 씩 억울한 듯 눈물을 보이면 제 속은 한강이 될 것만 같습니다. 순간 끓어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리 없는 눈물로 대신하는, 그것도 행여 할머니께 걱정 들을까 봐 방으로 들어가 훌쩍이면 제 마음은 또 어떨까요. 슬그머니 다가가 운동으로 다져져 단단해진 윤이를 토닥이며 속상한 그 마음을 다독여 줍니다. "많이 속상하구나. 조금만 참고 지내다 보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덩치만 컸지 여린 마음을 가진 윤이에게 모질게도 "자존심이 있지 그깟 일로 울일인지 잘 생각해 보렴. 우리 윤이 강해지기로 했잖아" 분명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이성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춘기의 감정이 찾아와 버렸으니 저 어린것이 감내하기가 버겁기만 할 텐데. 그럼에도 막상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볼 때면 너무 나약해 보이는 모습에 안쓰러우면서도 이 할머니는 차오르는 화를 누르기도 바쁩니다. 그래도 할머니 말에 수그러들며 잠시 바람이 지나간 듯 훌훌 털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방을 메고 학원을 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시리기만 합니다.


학원에서 돌아온 윤이를 위해 오늘은 삼겹살을 바삭하게 구워 한가득 담아 주었더니 어찌나 맛있게 잘 먹는지요. 저렇게 해맑은 아이에게 왜 그리 큰 시련을 줄까요. 따스하게 스미는 봄날의 햇살이 부러워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심술궂은 꽃샘추위처럼 분명 우리를 시샘하는 것이라 여기며 꿋꿋하게 이겨내야겠지요.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그다음 날이 더 좋아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더 많이 성숙해지고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서로의 마음속에 평안함이 깃들 날들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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