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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17. 2024

불효녀라는 꼬리표

추석을 맞아 요양원에서 4대가 모였다(24.9.16)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요양원면회 규칙이 강화되었다. 4인면회 규칙은 그대로지만 다시 진단키트검사를 하여 음성인 경우에만 면회가 가능하고 음식섭취도 어머니께서만 간단하게 할 수 강화되었다. 그나마 추석명절 연휴 면회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면회가 또다시 중단되었더라면 더없이 죄스러운 추석이 되었을 것이다. 지난번 면회에서 우리 아들딸을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 마침 시간이 되는 아들과 함께 추석전날에 가기로 예약을 했다. 딸은 시집이 강릉인 관계로 명절 전에 갔다가 올 예정인데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에 가기로 했다.


어머니는 함께 하지 못하셔도 우린 우여곡절 끝에 작년 추석명절에 약속한 대로 명절 일주일 전에 온 가족이 산소에 모여 차례음식을 올리기로 했다. 작년 추석에 조카들에게 미리 산소를 다녀오고 연휴에는 각자 여행이든 뭐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치 못했던 병원투어로 그 일을 미리 의논하지 못했고 결국 임박하여 결정하다 보니 생각지 못했던 잡음이 었다. 많지도 않은 4형제임에도 참 쉽지가 않다. 어쨌든 잠시 불편한 마음들이 있었지만 서로 협의가 잘 되어 일주일 전 주말로 결정되었다. 한 번쯤은 그런 진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릉사돈댁은 신세대 못지않은 완전 오픈마인드다. 두 아들이 집에 오는 날이 제삿날이고 성묘 가는 날이다. 음식도 간단하게 시장에서 사서 가시기에 며느리인 딸이 신경 쓸 일이 없다. 전에는 가끔 음식을 넉넉하게 해서 보내드리기도 했지만 우리도 간소하게 하면서 각자도생이 되었다. 이번에도 딸이 예약한 리조트에서 지내다 멀지 않은 산소에 성묘만 하고 집으로 오기로 했다. 이렇게 각 집안마다 추석명절을 보내는 모습들이 다채로워져 간다.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가족이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다.




여름이 떠나지를 못하고 아침부터 찌는 더위로 넓은 정원을 두고도 실내에서 면회가 진행되었다. 매번 만나 뵐 때마다 어머니의 깊어져가는 주름들이 온몸을 더 작아지게 한다. 그렇게 울며불며 그리던 손자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목울음을 삼키며 반가워하셨다. 하지만 요양원에 가신뒤에 낳은 노할머니께 보여드리겠다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온 증손녀는 예쁘다 하실 뿐 낯설어하셨다. 추석을 맞아 요양원에서 드디어 4대가 모였다. 뜻깊은 장면이라며 요양원 측에서도 사진을 찍어갔다. 어머니, 남편, 아들, 손녀딸 4대가 함께한 사진을 찍으며 울컥했다. 어머니께서 잘 견뎌내시고 계시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가져간 음식들을 입에 넣어드리며 얼굴과 몸을 살폈다. 어디가 어떤지 살펴봐야 어머니의 건강을 가늠할 수 있기에 매번 그러는 편이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당신 손이 차가운 줄도 모르고 자꾸 손자손이 따뜻하다며 놓지를 못하셨다. 오늘은 보고 싶었던 손자로 인해 이 며느리는 완전히 찬밥신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내장수술을 한 왼쪽눈이 흐릿하니 심상치가 않다. 연세가 있으셔서 저리 말라가나 싶었는데 무엇인가 조짐이 석연치가 않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어디가 아프신 것은 아니니 병원을 가기도 그렇다. 아직 그것까지 형제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명절이 지나고 간호팀장님과 통화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추석이라고 가져간 녹두전과 식혜등을 어찌나 잘 드시는지 친정부모님이 생각났다. 정작 친정 부모님은 고생만 하시다 일찍 떠나셨기에 제대로 해드리지를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친정아버지. 어머니도 내손으로 요양병원, 요양원에 모셨다. 아버지께서는 파킨슨으로 서서히 거동이 불편해지시며 그 호탕하시던 성격도 모가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혼자 힘으로는 움직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방문요양보호사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힘들어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었다. 한 살 위인 작고 여린 어머니로서는 덩치가 크신 아버지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아내를 끔찍이 위하셨던 아버지는 두 딸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위해 요양병원행을 결정했다. 그 권유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참 모진 사람이다. 그렇게 예쁜 둘째 딸이라고 아껴주시던 아버지께 그런 말을 해야 했다니 지나고 보니 참 나쁜 딸이었다. 그렇대도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체격이 좋으셨던 아버지를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고 병의 특성상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음 약한 아들놈들은 눈물만 질질 짜니 당찬 언니와 아버지와 말이 잘 통하던 내가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요양병원에서 아버지는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뼈마디가 드러나고 그 좋으시던 풍채는 간곳없이 사라져만 갔다. 여기저기 굳어지며 병상에 누워 눈만 껌뻑이시며 경관유동식으로 연명하시던 날들도 짧기만 했다.


결국 온몸이 굳어지며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셨고 그때가 되어서야 당신 몸에 꽂혀있던 모든 것들을 오빠의 통곡 속에 빼버리고 그리시던 집으로 돌아오셨다.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당신이 누웠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담담하게 흐린 눈동자로 당신 방 안을 둘러보고 당신 자식들과 눈 맞추며 손을 맞잡은 채 고요한 모습으로 떠나셨다. 그렇게 난 아버지를 외롭게 요양병원으로 모신 천하에 없는 불효를 저질렀다. 그뿐이랴 친정어머니도 내손으로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렇게 요양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며 버티시는 어머니를 그 알량한 상담사라는 말발로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세가 깊어졌던 어머니는 요양원에서도 오래 계시 못했다. 응급실로 요양병원으로 전전하다 허망하게 몇 개월을 못 버티시고 언니와 나의 통곡 속에 가셨다.


그 모든 결정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설득하고 요양원을 알아보고 답사를 하고 다시 요양병원을 물색하고 하루라도 더 함께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픈 친정어머니를 끌고 다녔었다. 사업에 바쁜 오빠, 나이 든 언니, 여린 남동생들. 물론 형제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언제나 알아서 결정했을 거라며 내 뜻을 믿고 따라주었다. 그렇기에 그 아픔이 덜했다고 해야 할까. 부모님을 보내드리면서 우린 결코 서로를 서운해하지 않았고, 우린 최선을 다했다며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친정부모님에 시어머니까지 시설에 모신 불효녀라는 그 꼬리표는 영원히 안고 가야 하는 나의 아픔이 되었다.


24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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