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시골마을의 부유한 집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며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쌀 몇 가마니를 주어야 산다는 귀한세발자전거도 타고 다녔다고 했다. 전답에 야산까지 풍족하니 대대손손 부를 쌓으며 머슴을 몇씩이나 둔 부잣집이었다. 기골이 장대하셨던 시아버지는 그런 집안을 진두지휘하며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지나가는 걸인도 집안으로 불러들여 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양반이 그 넘에 아들 때문에 여자를 몇씩이나 들인 것일까? 최근에서야 산책을 하다 남편이 무심코 뱉은 말에 한 대 세게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한들 이제와 뭘 어쩌겠냐마는 도대체 이 집안의 정체는 화수분도 아니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길이 없다. 그때도 그랬다. 본처가 있다는 것도 모자라 그분의 딸이자 남편의 큰누나가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허름한 서울집에서 남편의 박봉으로 몇 식구가 살아가는 와중에 내가 어려서 너를 업어 키웠다는 둥 감성팔이를 하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호적에서만 이름 석자를 보았지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 나타나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었다.
그래도 우린 젊었고 나이 드신 남편의 누나가 와서 눈물콧물 찍어가며 빌려달라는데 순진한 건지 바보였는지 매달 이만 원씩 계를 들어 불리고 불린 삼백만 원이라는 금쪽같은 전재산을 몽땅 빌려주었다. 그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돌려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섰다. 마침 낡은 기와지붕이 무너져 비는 줄줄 새어 돈이 필요했고 간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체면이고 뭣이고 없었다. 제발 빌려드린 돈만 다시 돌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때서야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몇 년 만에 원금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인연을 끊었지만 본처가 즉 본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뻔뻔하게 아버님이 계신 산소로 오고 싶다 하였지만 그때 그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일들로도 시달려왔기에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아마도 그때 그 일들만 아니었더라면 한때는 누나였기에 마음 약한 남편은 어느 한 귀퉁이 에라도 산소자리를 마련해 주었을것이다.
그것이 다인줄 알았다. 더 이상은 내가 모르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큰어머니가 또 계셨다 하니 뒤로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것도 남편에게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 분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사시다 가셨다는데 그렇게 어머니 흉을 보시던 시고모님도 시작은어머니도 그분에 대해선 말씀해 주신적이 없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렇다고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낳으며 한집에서 살았다니 요즘상식으로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말이다.
나름 부유했던 집에서 대를 이을 아들이 절실했지만 어머니처럼 아들 하나를 낳아 두고 온 그분께서는 끝내 이 집에서는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결국 한동안 함께 지내다 아들을 줄줄이 낳은 어머니께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셈이 되었다. 그 후에도 그 분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시는 착한 분이었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남편이 성장하면서도 한동안 연락하고 지냈지만 두고 온 아들이 변변치 못하여 고생을 많이 하셨다며 안타까워했다. 남편의 기억 속에는 그분만이 있었을 뿐 그전에는 도대체 몇이 더 있었는지는 아버님만이 아시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조선시대도 아니고 믿을 수가 없다. 결국 내가 아는 대로라면 어머니는 두 번째가 아니라 시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인 것이다. 호적에 흔적도 없이 사시다 가신 그분과 흔적도 없이 사셨지만 여전히 지금을 살아가고 계시는 어머니가 계실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께서는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속마음은 부글거려도 참고 살았을지 그러려니 하고 사이좋게 사셨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뜬금없이 가서 기억도 희미한 어머니께 여쭤보기라도 해야 할지 생각할수록 참 기가 막힌다. 어머니의 삶도 참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