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야 Oct 16. 2024

시어머니의 그 과거만은 품지 않기로 했다

이제야 사랑으로 품는 시어머니(24.9.6)

8월 27화요일 그동안 저장글 저 아래 무겁게 내려 않았던 글들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져 세상의 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미리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읽고 싶지 않은 글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때를 기다려 오기나 한 것처럼 평온한 지금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었다.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신 후로 가장 컨디션이 좋으시고, 지난 1년 동안 병원에 가시는 일없이 잘 지내고 계시니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더구나 1년이 넘도록 이 글들을 써오며 심경의 변화도 많았다. 얼마 전에 마무리한 <정짓간에서 워 내는 글꽃>을 연재하면서도 수많은 생각들이 넘나들었다. 그동안 함께 살아온 세월 속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음을. 그렇게 채워져 누리고 있는 지금의 어느 것 하나도 그냥인 것이 없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밥도 반찬도 제대로 배운 적도 할 줄도 몰랐지만 어머니 옆에서 보고 배우며 아이들을 키우고 시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었음에도 40여 년이 되어서야 그 사실과 마주하며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가 잘나서 어머니보다 더 똑똑해서 모두 이뤄낸 것처럼 뿌듯해하고 자신감 넘쳤던 그 시간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수없이 많다. 살아온 시간들이 자산이 되고, 수없이 부딪치며 익힌 것이 재능이 될 수 있는 것이거늘 저 잘 나서 지금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아채며 어디에라도 숨고 싶어 진다. 반찬 한 가지를 만들면서도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어머니께서 하시던 대로~~~"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사소한 어느 순간에서도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나물. 스파게티, 자장면, 호박죽, 팥죽, 콩국수, 치킨, 선지가 듬뿍 들어간 우거지해장국, 도토리묵, 가지볶음, 호박나물, 잡채..... 수도 없이 많다. 이 많은 음식들을 같이 만들고 함께 먹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남편이 출근한 시간에도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출가한 뒤에도 함께했으니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어머니와 나는 하나처럼 살아왔다.


그럼에도 맏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만으로 나 자신을 몰아세우며 안쓰러워하고 죄스러워할 뿐 그간의 노고와 애정에는 야박하기만 했다. 아니 때로는 돌봄에 힘겨워했고 그 끝이 어디일지 몰라 불안해하며 헤매기도 했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나의 진심이 부족했고, 연민만이 가득한 채 사랑이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만이 앞서 어머니와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어머니와 나만이 알고 있는 무엇들을 차갑게 외면해 왔다. 이제라도 나의 따스한 손길로 어머니의 온기가 사라져 가는 손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드릴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으신 어머니의 얼굴이  언제나처럼 그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위선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일 뿐이라고 해왔으니 누구의  이해도 바랄 수는 없다.


어느 결에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 그 간극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다 해도 명쾌하게 답할 길은 없다. 그것에 대해 참과 진실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도 탓할 수가 싶다. 본인도 산뜻하게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해야 한다면 지난날들의 시간 속에서 운명처럼 거스를 수 없는 그 무엇들이 날 그곳으로 인도하여 스며들게 했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저 자식처럼 품고 가야 할 가녀린 생명이고, 모두의 사랑 속에서 잠시 다녀가는 소풍처럼 고요히 떠나실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진심을 다해서.




아직도 숙제처럼 남아 망설임 속에서 끌어안고 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기에 속절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집에서 가까운 유명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집안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집안일만큼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 10시에 오픈하고 아들이 돌아오는 4시에 퇴근하는 것이 나의 근무조건이었다. 어느 날 시장에 들러 두 손 무겁게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마루 앞에 낯선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예고 없이 처음 마주한 그 만남당황스럽기만 했다. 며칠 동안 꿈자리가 사납다며 남편이 보내서 왔다고 어색하게 말하던 이미 초등학생인 남매를 데리고 찾아왔던 젊은 여자분. 그때 어머니께서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머니의 큰며느리와 손주들이었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급작스러운 대면에도 뭔 정신으로 저녁을 해서 먹고 치킨까지 시켜드렸다. 그냥 평범한 손님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루를 어머니와 자고 갔었던 같은데 왜 그 기억이 희미한지 모르겠다. 교통도 편하지 않은 때이고 집이 멀어 그 저녁에 갈 수도 없었을 텐데 지우고 싶은 것인지 그 기억이 선명하지가 않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결혼 전에는 왕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론 그 가족을 단 한 번도 뵌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결국 내가 모자의 만남을 가로막은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 부분에 대해 묻거나 불편한 기색을 비친적이 없건만 또 그렇게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분 입장에서는 두 번 버림받은 셈이 될 수도 있다.


그 후론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그저 사는 게 바빠서 그 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내 눈치를 보느라 큰 자식을 아프게 품고 사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머니 현재의 안위와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 한 번 그 길을 선택하셨을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완벽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들, 결혼해서 딸아들 낳고 한집에서 하나하나 꿈을 이루기 위해 알뜰하게 살아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일상에 어머니의 또 다른 아들을 끌어들일 여유도 공간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와 그분들께 미안해지는 걸까.


어머니께서 상태가 안 좋으시다면 이런 생각을 못했겠지만 요즘 총명하시기에 한 번쯤은 방법을 찾아서 연락해서 조우라도 해드리면 어떨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다 도리질을 했다. 성성할 때는 찾지도 않다가 다 늙어 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엄마를 찾아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잘 살고 있는 그분들을 난데없이 들쑤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또 만나게 해 드린다 해도 80이 다 된 아들을 어머니께서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그 난감한 상황을 어찌 감당할 것인지. 만약 그렇게 이어져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찾아올 낯선 아들을 집안내의 어른이 된 남편은 어머니의 과거를 모르는 일가분들께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을  다. 본 적도 없는 그 아드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묻어두는 것이 어머니를 지켜드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자 이 일은 나만의 생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나 역시 내 가정을 지키고 싶은 이기적인 며느리이기에 어머니를 사랑으로 품기로 했지만 그분만큼은 끝내 그럴 수가 없다. 어머니와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24년 9월 6일

이전 19화 장기적인 돌봄이 쉽지 않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