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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Oct 24. 2024

더 이상 시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부유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온갖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귀하게 자란 시아버지. 항상 넉넉한 웃음으로 마음 좋아 보이시던 둘째 남동생과 까칠했던 성정 탓에 어머니를 꽤나 시집살이를 시키셨다는 아들하나 낳아보겠다고 딸만 일곱을 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성하게 태어났지만 어려서 목을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다 간 막냇동생. 3 1녀의 장남이셨다. 그러하니 동생들이라면 끔찍하게 여기셨고 남편 또한 시아버지의 그런 성정만은 그대로 닮은 듯싶다. 거기까지로 시골에 그대로 셨더라면 이 집안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골에서 돈푼깨나 쥐고 사셨던 시아버지께서는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작스레 사업을 하시겠다고 앞산 하나를 팔아서 부모님과 자식 일곱을 거느리고 서울에 입성하셨다. 그때부터 가족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사업이란 것이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시골농부의 패기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투자했던 사업들은 번번이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왔고 그것이 화가 되어 각종 병에 시달리셨다. 그런 과정에서 시골에 있던 땅들을 팔아다 야금야금 생활비로 탕진하며 남아있던 땅마저  누구도 모르게 막내 시작은 아버지 앞으로 모두 넘어가 버렸다.


 사이 식구들은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며 어렵게 살아야 했다. 그뿐이랴 당신 몸이 아프니 그 화는 식구들에게 모두 쏟아지고 그 비위를 맞추려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물러 드리기 바빴다 한다. 그렇게 한 가정이 몰락해 가던 중에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남편은 졸지에 가장이 되어 시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빛과 경매에 넘어가버린 허름한 집 한 채지만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출근도 미루고 동분서주했다. 그것이 나와 결혼하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칠 남매 모두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존경한다는 것이다.


맏며느리이다 보니 가끔 시제 집안내 문중모임에 참석하곤 한다. 그곳에서도 역시 시아버지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문중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선뜻 나서 말끔하해결해 주시고 한때 선거판에도 기웃 거리 셔서인지 큰 죄를 지은 집안내 어른도 보살펴주셨다고 한다. 그런 시아버지를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집안을 몰락시켰다는 이유로 나만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사사로운 일들에는 관심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 지금까지도 시아버지는 이 집 안의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남도 아니고 내 가족을 그것도 살아계시지도 않는 분을 미워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말이다. 상대방은 모르는 일을 나 혼자 그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 싶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온전히는 못하더라도 남편의 아버지이고 내 아들의 할아버지이신 분을 더 이상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개인의 가정사를 이렇게 낱낱이 드러내며 꼭 이 글을 써야 할까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특별했다면 특별했을 인생사와 함께 나 또한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에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때 글로 남기고 싶었다. 예전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이 글을 발행하면서도 남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감당을 해보는 쪽을 선택했다. 연일 메인에 오르고 조회수가 폭등했다. 그제사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일이 커져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연재를 알리고 메인화면을 들이밀었다. 제목만 보고도 그 성정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럴 줄 알았기에 미리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한글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저지른 일이다. 왜 불같이 화를 내는지 남편의 그 마음은 알고도 남는다. 우린 서로 말한 적은 없지만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께서 호적에 없는 것이 남편과 나의 치부라면 치부였다. 그럼에도 삼대가 행복하게 사는 우리 모습을 보고 남편의 직장에서는 끊임없이 효행상을 추천했고 나 역시 주위에서 효부상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러한 사연이 있기에 극구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잘못도 어머니의 잘못도 아니지만 굳이 우리 가정사를 드러내 놓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런 상을 받기에는 우린 너무 평범했고, 그 상을 받고 부담스럽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남편의 심정을 알기에 차근차근 이 글을 써온 과정들과 앞으로 내가 그려나갈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그 뒤로 연재소개글을 보았는지 더 이상 이 글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 혹여 형제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과연 이 글로 인해 어떤 평지풍파라도 일게 될까 염려스러운 남편의 복잡한 그 심경 다. 그럼에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내 글쓰기를 지켜봐 주는 남편이 더없이 고맙다. 만약 끝까지 반대했더라면 쓰인 글들을 모두 내리면서 더 이상 글쓰기를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어머니께서 내 곁에 계시는 한 이 글은 계속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남편에게 이 글로나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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