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벼운 마음으로

by 희야 ㅡ 박상희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캘리그래피를 갔었다. 캘리그래피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 무색하게 2주나 빠졌다. 양양여행으로 대학병원진료로 빠지다 보니 일찍 오던 사람이 안 보여서인지 다들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나의 안위에 모든 분들이 관심을 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K친절에 감사할 뿐이다.


한주가 지난 오늘은 H가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는 아무 말 없었는데 그 아프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타난 H의 열정에 두 손 들었다. 앞으로도 병원진료가 화요일에 잡혀 있어 또 빠져야 하는데 반성을 해야 하나. 캘리그래피를 배우겠다고 진료일을 변경하기도 그렇고 해서 다음진료일까지는 지정해 주는 대로 따랐다. 아무래도 계속 화요일이면 담당교수님 진료일을 확인해 보고 가능하다면 다시 조정해 봐야겠다.




지난주 화요일에는 남편이 가족묘를 조성하는 문제로 새벽에 나갔다. 하루 온종일 나만에 시간이었다. 캘리그래피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나오곤 했었는데, 그날은 급하게 점심 챙겨줄 사람도 없기에 실실 미적거렸다. H도 어차피 집에 가면 아무도 없을 것이고, 함께 나오다 점심 먹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성사된 점심식사를 위해 가던 길에 슬그머니 내 민증도 오픈했다. 한 살 아래이니 친구해도 되겠냐고. H의 호들갑에 걷고 있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나보다 한참 아래인 줄 알았는데 맞는 거냐고. 나쁘지 않은 발언이지만 스치는 낯 모르는 사람들에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다.


그렇게 순식간에 급격하게 가까워진 듯한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완전 의외인 것은 밥을 반밖에는 절대 못 먹는다는 것이다. 그럼 그 몸은 어디에서 온 것이지. 간식도 안 먹는다지. 도대체 뭐야. 누구는 먹으려 해도 못 먹고, 먹고 싶어 먹어도 탈이나 더 빠지고. 에잇! 속상한 세상이다.


H의 슬픈 가족사가 펼쳐졌다. 아직도 내담자인양 공감하며 눈물을 삼키다 빠져나왔다. 언제 적 상담사라고 가끔씩 이렇게 상담을 해오는 지인들이 있다. 때문에 제버릇 버리지 못하고 얼결에 들어주기도 한다. 상담이란 것이 깊이 들어가면 한도 없지만, 대부분 지인들이 말하는 내용들은 하소연이거나, 사소한 갈등이다. 상담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임상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도 아니고, 꼴랑 학생상담위주로 해온 걸 알면서도 뭘 그리도 물어오는지.


또 삼천포로 빠졌다. 어쨌든 타 지역에 왔으니 환영하는 의미로 점심은 내가 쏘는 거로 했다. 어딜 가나 활달하고 앞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H의 지난날의 활약상을 들으며, 그녀와의 캘리그래피 수업이 기대가 된다. 오늘도 "바쁘지" 하며 나에 여유시간을 파악하려는 의도를 뒤로 하고, 자주는 아니고 가끔은 H와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오늘의 캘리그래피 수업은 그라타주(grattage)와 같은 기법을 활용한 작업을 했다. 요즘은 참 좋은 세상인지라 굳이 애써 크레파스를 겹겹이 칠할 필요가 없다. 이미 칠해진 엽서 크기의 까만 바탕 위를 조심스럽게 뾰족한 나무로 긁어나갔다. 그리고 좀 굵은 나무로 그린 것처럼 말끔하게 밀어 예쁜 바탕색들과 마주했다.


가장 심플한 그림과 단어들을 선택했다. 처음 캘리그래피를 왜 하려고 했는지.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힐링이 되는 시간"

'가벼운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내 손길이 가는 대로 마법처럼 나타나는 글들을 보며, 진정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림을 못 그리고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치 않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내 마음을 듬뿍 담아 집중하며 글자를 써내려 가는 이런 시간들을 즐기면 된다. 세상사 복잡한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내 안의 나에게만 집중해 본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오색길을 거니는 것처럼 캘리그래피와 한 몸이 된다. 더구나 내 앞에 펼쳐진 알록달록 고운 색들로 잠시 미소 짓게 되는 이 시간이 그저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