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라는 환상, 그리고 깨달음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가 살아남아서 가정을 이뤘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배우가 되길 꿈꿨지만 결국 가정주부로 남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해외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꿨지만 아버지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회사원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야기. 이들의 서사는 도리스 레싱의 『19호실의 가다』를 떠올리게도 했다. 에이프릴의 마지막 순간까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특히 에이프릴의 그 대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린 특별한 것 없는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포기가 안돼요.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어요.” 그 말에 배경음악이 바뀌는 그 장면! 진짜 감독, 연출 감탄밖에 안 나왔다.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된다!!!
사실 나도 ‘안창부부’라는 이름 아래 우리 부부에 대한 부러움 섞인 시선을 꽤 즐겼다. ‘쟤네 부부 좀 봐봐, 아직도 연애하는 것 같아. 어릴 때부터 만나 결혼까지 했으니 진짜 성공한 사례야. 애 없어도 금슬 좋아, 어떻게 저렇게 잘 맞지? 이상적이다’라는 평가들. 나 역시 ‘그래, 우리 부부 진짜 예쁘고 사랑받고, 서로 아껴주고 동물도 입양해서 키우고, 애 없지만 친구 같고 말도 잘 통하는데 뭐가 문제야!’ 하며 어느새 허영과 뽕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가 겪는 고통도 모르고 부모 입맛에 맞는 사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위를 골라 와 부모 영향력 아래 소꿉놀이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그런 진실을 본 이들은 영화 속 에이프릴이나 『19호실의 가다』 수전처럼 방황하게 된다. 더 이상 그 구조 안에 있을 수 없고, 결혼생활이란 허위, 타인들의 시선과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가정이라는 기준에 맞추느라 잃어버린 자신을 견딜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진실을 본 자는 어떤 식으로든 내몰리게 된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나를 살리는 길, 주체적인 길로 가느냐, 아니면 수렁으로 빠지느냐를 결정한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귀인들이 존재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작년 여름 나는 숨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생존에만 매달렸다. 부모가 있음에도 그들이 내 ‘사람들’로 느껴지지 않고 나를 잡아먹을 존재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그 입을 찢고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나에게 이혼은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에이프릴처럼 남편에게 함께 하길, 이 길에 동참해주길 바랐고 그런 제안도 했다. 둘은 파리를 낙원이라 믿으며 도망치려 했지만, 현실과 사회의 벽은 녹록지 않았다. 에이프릴은 그때 무너졌을 거다. 마지막 하나 남은 끈마저 끊어졌을 때, 포기할 수도 없고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그 세계에 갇히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고 외로운지, 나는 안다.
하지만 그녀는 살기 위해서 뭐라도 했어야 했다. 혼자라도 도망가든가, 아니면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살기를 선택했어야 했다. 정말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마 했겠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말이다. 엄마도, 아내도, 누구로도 살 수 없었던 에이프릴은 임신한 아이를 지우며 자신도 버렸다. 『19호실의 가다』 수전이 그랬던 것처럼. 파리로 가려던 계획이 뒤집히며 드러난 그녀의 좌절 어린 표정, 모든 희망을 잃은 얼굴이었으니까.
솔직히 모르겠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파리에 갔다면 살았을까? 에이프릴이 비서로 일하고, 프랭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아이를 돌봤다면 행복했을까? 그들답게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맛을 봤을까? 아마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파리로 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을 거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 고통 없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돈 있고 명성 있고 집, 가족 모두 갖춘 사람도 하루의 80%는 엿 같은 시간으로 보낸다. 주체성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건 받아들여야 할 진리다. 영화를 보며 권태가 부부를, 개인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일부일처제나 자식 둔 정상가정이라는 환상이 얼마나 허상인지, 그 이미지 유지하려 타인 시선에 맞추느라 ‘나로 살지 못하는 것’의 폭력성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안타까워했다.
타이타닉의 로즈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주어진 세계를 떠나 모험을 시작하며 영화가 끝났다면, 레볼루셔너리의 에이프릴은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나에게 경각심을 줬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원형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위대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