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파를 두던 세계를 떠나며...

필연의 기록

by Tess

꼬리뼈에 미세골절을 입은 뒤로 전혀 섹스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 명의 섹파를 두고 있었는데, 그는 크로아티아에서도 꾸준히 연락을 하던 ... 나에게 정성을 들이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야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꼬리뼈만 나으면!!!'하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욕망이 푹하고 꺼졌다. 정말이다.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는지! 진짜 신기하다.


일주일 전의 나만해도... 꼬리뼈가 빨리 나아야 하는 이유가 섹스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목적지향적이었다. 시간만 나면 한의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또 방광염때문에 비뇨기과를 다니면서도 '빨리 나아서 섹스해야지!'라며 견뎠다. 치료를 받는 목적이, 그 아픈 주사를 찔리는 목적이 섹스일 정도로 뭐에 단디 씌여있었다. 어느정도냐면... 내가 저리 병원을 다니면서도 브라질리언 제모할거라고 예약까지 잡던 사람이었음! 그만큼 섹스에 미쳐있었다. 욕구에 휘몰아쳐있었고, 그 욕망에 기꺼이 내 몸을 맡기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멀스멀 '이게 맞나? 이렇게 가볍게 욕구만 채우는 사이로 산다고?'하면서 질문이 올라오는거다. 섹스를 하겠다고 틴더에서 남자를 만나면 보통 원나잇을 하거나, 좋으면 한 3번까지 자봤다. 그 이후엔 흥미가 확연히 떨어졌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달까? (이렇게 말해도 내가 평생 자 본 남자가 10명이 안된다ㅜ) 이번 섹파는 그래도 5번까지 만나서... 장기적으로 fwb 관계를 가져볼까? 하며 정착할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나를 '성적 대상화'로만 보는 시선이 지겨워지는거다!!! 성적 욕망을 쏟아놓으며 킬킬거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 반복됨이 싫어졌다.


나는 내가 가진 겉껍질(몸, 외모, 스타일)보다 내면이 풍성하고 풍부하며 복잡한 사람인데... 이를 보지 못하고 '히연이 몸매 최고야. 먹고싶어'라는 말만 하는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불편해졌다. 불과 2달전만해도 확신이 있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거야. 얉디 얉은 관계.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몸만 섞는 관계! 최고야' 하면서 찬양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욕구를 충족시키며 사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런게 여성해방인가? 난 정말 주체적으로 살고 있어'라며 엄마의 정조대, 유교녀의 언어를 벗어난 해방감에 잔뜩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욕망의 방향이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섹스만 하며 욕구를 채우는 건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깊은 교류를 하고 싶다. 대화와 데이트가 더 하고 싶달까?

사실 이런 식의 다른 마음이 생긴 지는 한 달 정도 된다. 내가 틴더앱을 지웠을 때 쯤이니까... 하지만 이런 욕망이 올라왔어도, 파트너의 욕구를 들어주느라 망설였었다. 그런데!!! 마침 엉덩이가 깨지는 바람에, 또 방광염까지 걸리는 바람에, 몸이 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나는 멈췄고.. 그러면서 확신을 얻었다.

"나는 더이상 가벼운 관계를 원하지 않는구나. 나의 몸은 많이 채워졌구나. 이제 그만해야겠다!" 라면서....

그리고 나는 그에게 그만하자고 이야기를 했고, 그도 동의했다.


내가 이렇게 원나잇을 하고 섹파도 두는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공허함이다. 나풀거릴정도로 가벼우니, 공허함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그런만큼 그 끝도 무척 쉽더라. 카톡으로 '그만하자' 하면, 그쪽도 '알았어' 하는 것이 다 였다. 나는 이 정도 매너라도 서로 지켜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났다. 달아올랐던 몸도 불이 확 꺼졌고, 나의 욕망은 다른 쪽을 향해가고 있다. 전남편과의 헤어진 아픔을 섹스로 풀던 살풀이가 끝났다. 섹스를 안해도 될 것 같은 느낌. 혼자 있어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든다. 하.. 이게 얼마나 또 안정적인 정서를 주는지! 섹스를 안하니, 털 걱정, 몸매걱정, 집에 누가 온다라는 정체모를 불안함, 임신걱정 이 모든 것에서 해방이다!!! 또 다른 해방감을 준다. 엉덩이 깨진 사건이 얼마나 필연적이었는지, 나에게 꼭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는지 온 몸으로 이해가 된다.


언제 다시 이 발악시즌이 돌아올 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혼자있으려고 한다. 요즘의 나는 많이 안정된 것 같다. 책으로 영화로 사람으로 여행으로 게걸스럽게 도피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너무도 입 다물고 혼자있고 싶다. 혼자 있기 위한 그 시간을 확보하기위해 애를 쓴다. 그렇게 나는 공식적으로 누굴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또 다른 자유이자 해방이다. 휴. 숨이 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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