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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Mar 19. 2021

첫 날밤, 숨 막히는고독과 외로움.



정착교육기관에서 2개월간의 정착교육을 마치고 저는 전라도 광주의 한 주공아파트에 짐을 풀었습니다. 11평 정도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오로지 저만의 공간입니다.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할지 아직은 계획이 없지만 적어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안경찰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교육기관에서의 집단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혼자 밤을 보내게 됩니다.

공간이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11평이라는 공간은 한없이 크게 느껴질 만큼 공허하고 허전하고 쓸쓸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가재도구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으니 지금까지의 여러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고향을 떠났다는 서글픔,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막연함,

짐은 풀었으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끝 모를 고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내가 이런 순간을 위하여 그동안 그런 위험들을 감수했었나 하는 억울함.

복잡 미묘한 심리상태에서 여러 감정들이 어우러져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으로 펑펑 소리 내며 한없이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쓰러진 듯 잠든 듯합니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이 되었지만 횡뎅그레한 방 안은 쉽게 적응되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늘 혼자였지만 특별히 더 외로웠던 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겠죠.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형국입니다.


당시 영락교회에서 준비해준 가재도구인 밥솥. 가스레인지. 밥그릇과  국그릇이 있기는 했지만 가스레인지는 어떻게 설치하는지도 모르고 설치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먹을 것도 없었고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없는 건 당연하기도 했지요.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숨 막히는 외로움과 적막감입니다. 그동안은 두려움과 공포가 컷기때문이었을가요? 이런 고독은 몰랐습니다.

고독이 무섭구나 하는것도 저음 느꼤습니다

외로움때문에 삶의 의욕일 잃을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살아야 했습니다.

살려고 왔는데.

살아야 했습니다.

이 적막과. 고독과 숨 막히는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앉았다 보면 점점 더 무력해지고 정말 삶이 어떻게 될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뭘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멀까

감도 잡히지 않고 엄두도 안 났습니다.

나만 이런 감정일까.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을까.  생각하던 중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창하고 대단한 무엇을 하기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장 쉬운 모습부터 경험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현금 만원을 들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북한에서 저의 월급은 140원입니다. 북한에서 국가 공식 가격으로 쌀 1킬로 8 전이니 꽤 많은 월급입니다. 일반 노동자 급여의 3배 정도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북한 경제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될 때의 상황입니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국정 가격(국가에서 정한 공식 가격)은 없어지고 거의 시장가만 존재했으며 140원이라는 돈으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140원의 급여를 받던 저에게 한국의 만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금액입니다.


한국돈 1만 원으로 얼마만큼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만원을 들고 근처 시장, 마트들을 슬슬 돌아봤습니다. 아.. 하. 별로 살 수 있는 것이 없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고 있던 돈 가치와 완전히 다른 겁니다.

돈의 가치에 대한 비교까지 하려면 너무 복잡해서 이곳에 다 풀지는 못하겠습니다만. ㅎㅎ

                (매우 복잡하지만 올해 설 즈음 북한에서 기름 한 병이 북한 돈으로 2만 7천 원.
                현재 중국돈 100원에 북한 돈 5만 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란 한알이 북한 돈 1.200원입니다.
                2020년 11월 기준 중국돈 100원이 한화로 16.731원 정도입니다.

               제가 숫자에 많이 미숙하니 꼭 계산해보고 싶은 분들은 자체로 계산해 보십시오~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암튼 한국돈 만원의 가치는 제가 상상했던 수준의 가치와는 상당히 차이나는 가치였다는 겁니다.

이제 내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겠다는 대략적인 감이 잡히는 거죠.

이렇게 한국생활에 첫 발자국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시내 구경 나갔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택시만 타고 다녔습니다.

시내에 나갔다가 집을 제대로 찾아올 수 없을까 봐 집주소를 잘 기억해가지고 있다가 택시기사님께 말씀드리는 거죠. 이상한 저의 악센트에 놀라기는 했지만 택시기사님들은 그래도 정확히 아파트 앞에까지 잘 배달해주셨답니다. ㅎㅎ


살고 있는 아파트 반경 일정한 거리까지 익숙해지고 택시비가 아깝다고 느낀 어느 날, 버스도 한번 타봐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택시만 탈 수는 없으니 빨리 버스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야 되겠다 싶은 거죠.

아파트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몇 정거장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를 다시 타고 와야지~~ 하는 작정이었죠.


버스는 어떻게 타는 걸까.

물론 그냥 올라타면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잘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버스 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버스표를 내면서 승차하고 있더라고요.

북한도 버스표를 냅니다. 아하.. 북한과 비슷하네 생각이 들어서 매우 신기하더라고요.

문제는 이 버스표를 어디서 구매하느냐 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근처에 매표소는 없는데 사람들은 버스에 오를 때 자연스럽게 버스표를 제출하는 것 봐서는 미리 가지고 있다는 거죠.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버스표가 없으니 저는 탈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가고 오는 사람 구경하면서 앉아있는데..

어머.. 이게 뭡니까.. 버스표가 아닌 돈을 내고 버스 타는 사람도 있네요..

아하... 버스표 대신 돈도 받는구나 생각했죠.

다음 버스가 올 때 얼른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만 원짜리를 기사님께 드리니 기사님이 다시 저한테 휙~~ 던지시는 겁니다. "아줌마. 만 원짜리 가지고 어떻게 버스 타요~ 내려요"


버스 안의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죠.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멀쩡한 젊은 여자가 그것도 모른다는 생각과 튀어나오게 될 거친 악센트와 사투리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가 봐 못 물어보고 얼른 차에서 내렸어요.


이상하다.. 돈 내고 타는 사람도 있던데..

내가 무얼 모르고 있는걸가. 뭘 잘못하고 있는걸가.

또 한참 그렇게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들고 타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아하.. 버스비가 천 원이구나..

앗싸!.. 이제 됐다.

손에 쥐고 있던 만 원짜리를 들고 근처 매점에 가서 껌 한 통 사면서 거스름돈을 받았죠.


그리고 1000원 자리를 들고 용기 있게 버스에 올라 버스 통에 넣고 최대한 빠르고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아줌마!!!" 하는 아저씨의 버럭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나? 차마 나는 아니겠지.

만원 아닌 천 원을 제대로 넣었는데..

태연하게 창밖을 바라보는데.. 다시 부릅니다.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요.

"아주마요. 아줌마.. 거스름돈 받아가지고 가야지~~"

헉~ 거스름돈이 있었나 봅니다. 거스름돈 300원.

당시 버스비가 700원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입니다. 하. 하. 하.


이렇게 버스비 700원을 몸으로 몸소 치열하게 체험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버스표도 근처 매점 같은 데 가서 구매할 수 있다는 것도요.

물론 지금은 카드로 전환되어 버스표가 필요 없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버스표가 있었고 가격도 지금에 비할 수 없이 저렴했죠. ㅎㅎㅎ


이렇게 저는 첫날밤의 숨 막히는 적막과 고독을 견디면서 한국사회의 변두리로 한 발작씩 걸어 들어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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