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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념있는 희애씨 Apr 01. 2019

너는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

결국 엄마 눈에 나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누군가가 직업이나 하는 일을 물어보았을 때 직장의 이름을 말하곤 했다. "은행원입니다."가 아닌 은행명을 말했고, "공공기관에 재직 중입니다."가 아닌 공단 명으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조금은 들어갔던 것 같다. 특히나 우리 엄마는 딸이 거쳐온 수많은 기업들을 기억하며, TV를 통해 기업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 딸이 다녔던 곳' 혹은 '다니는 곳'이라고 자랑하기 바빴다. 엄마를 따라 동네 목욕탕을 갈 때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모든 관심을 받을 때에도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디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주로 받았던 것 같다. 엄마들 사이에는 우리 아들 딸이 얼마나 큰 집단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건 틀림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이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남편을 보내고 평생을 딸과 아들 키우는 것에 쏟아부었던 엄마에게 유일한 낙은 '아들 딸 자랑'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직장을 다니느냐를 의미한다는 것도. 엄마는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고 뱉을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딸과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밤낮 없는 돈벌이를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희생형 어머니였다. 내가 늘 꿈꾸던 방송일을 쭉 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전형적인 책임형 맞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 뒤로 더 나은 직장, 덜 후회할 수 있는 직장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고 결국 지금 나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다.




이번만큼은 누군가의 딸로서, 누군가의 누나로서 책임을 지는 선택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1년쯤 뒤에도 내 손에 아무것도 쥐어져있지 않다면, 경력을 살려 어느 작은 곳에서라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콘텐츠 제작, 멘토링 등의 일들이 일회성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에 불안해하셨다. 역시나 '소속'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만류에 돌아가기에는 내 마음이 확고했고, 동생의 취직이 해결됐다는 생각에 마지막 숙제를 끝내고 학교를 나서는 것처럼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요즘도 엄마는 하루에도 4-5통씩 전화를 하셔서 걱정을 한 바가지 쏟아내신다. 이미 그만둔 직장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항상 상반기 채용을 궁금해하신다.


그래도 너는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


얼마 전, 엄마가 집에 다녀가셨다. 1년 전, 결혼식 당일 이후 처음 찾은 딸의 신혼집에 들어온 엄마가 처음으로 손에 드셨던 것은 걸레였다. 깔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엄마의 청소가 시작됐고 이와 동시에 잔소리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환기는 매일 하니?" "냉장고에 안 먹는 것들은 그때그때 버려야 해" "화장실 변기 뒤에도 꼼꼼하게 닦아야 한다" 반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화장실 청소는 김서방 담당이야" 엄마가 집에 오신 이후로 가장 당당하게 대답하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너는 집에 있는 사람이잖아, 담당이 나눠져 있어도 네가 신경을 좀 더 써" 이 한마디는, 그동안 수화기 너머로 그토록 엄마 딸은 백수가 아니다, 이번에는 이런 콘텐츠를 제작하게 됐다, 반응이 좋다 등등 미주알고주알 얘기한 것들이 다 의미 없었다 것을 보여줬다. 머리로는 딸이 집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결국 엄마의 마음속에서 딸은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 '곧 다른 곳에 소속이 돼야만 하는 사람'


엄마가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렇게 좋은 직장들을 뒤로하고 소속된 직장 하나 없이 본인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겠다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여기실 거다.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으시면 그 순간은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다. 오랜만에 오신 엄마 옆에서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조심스레 또 토익과 토익스피킹 얘기를 꺼낸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인 줄 알면서도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 딸은, 백수가 아니라 프리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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