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2화
별의 베란다에는 화분이 아주 많다. 자취하면서 하나씩 모으다 보니 어느새 베란다가 거의 공원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다들 이름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까슬이, 보들이, 꽃잎이, 노랑이, 콩이 등등...
가끔씩 고향에서 친구들이 놀러 올 때면 핀잔을 주곤 했다. 이 좁은 원룸에 하나 달랑 달려있는 베란다를 식물들에게 양보하다니. 친구들은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고양이를 키워. 고양이 두 마리의 집사가 말했다. 별은 집사인 친구에게 말 그대로 ‘집사’가 되기 싫다고 반박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별이도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식물이 더 좋았다. 조금 나쁜 생각일지는 몰라도 고양이나 강아지는 내가 사랑을 안 주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그저 내 보살핌과 손길에 오롯이 자라나주는 식물들을 사랑했다.
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산 다소 이상한 식물을 제일 아끼는 위치에 배치했다. 가장 사랑했던 귀면각인 까슬이를 옆으로 살짝 밀어낸 결과였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별은 까슬이를 보며 배신한 건 아니라고 작게 읊조렸다. 어쩌면,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문득 씁쓸해지는 별이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누군가에게 밀려나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니 친구들과 약속도 못 잡고, 자꾸만 혼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다.
별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째 이런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걸까? 그것도 열심히. 그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한 채로 화분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묵은 피로들을 벗겨냈다. 참 예쁘다, 하고 좋은 말을 건네주면서.
“근데 넌 어디서 왔니.”
새침하게 자리하고 있는 오늘 산 화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유래를 알고 싶어서 식물도감 어플로 촬영을 했다.
“어? 뭐지.. “
한데 알 수 없는 검색 결과라는 단어만 뜰 뿐이었다. 별은 식물에 대해 관심이 많은 만큼 식물에 대한 지식에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정말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어플에서도 검색이 안 된다고..? 생김새와 특징을 구글링 해봐도 관련된 식물을 찾을 수 없었다. 변종인 건가. 내일 퇴근길에 다시 들러 사장님께 여쭤 봐야 하나? 온갖 궁금증과 의문이 생겼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만큼 특별한 식물을 키우게 된 것에 괜한 기대감을 느꼈다.
“너는… 궁금이로 하자.”
별은, 새로 온 친구에게 ‘궁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표를 붙여줬다. 그리고 그것을 인스타 스토리에 자랑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여전히 오늘 하루의 끝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별은 요즘 들어 자다가 깨는 일이 빈번했다. 깰 때마다 대리 생각이 났다. 누군가는 이 고민을 듣고 그거 사랑 아니냐고 놀려 댔지만, 별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꼭 자다가도 생각이 났고, 꿈도 자주 꾸었다. 집에서만큼은 생각 안 났으면 좋겠건만, 덕분에 싫어하는 대리와 24시간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새로 산 화분을 산 설렘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나마 나았다.
결국, 오늘 아침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버렸다. 망할 놈의 회사. 망할 놈의 대리.
진짜 정신과라도 가야 하나. 별이는 회사에 입사하고 잠을 제대로 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억울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불을 켜지 않아 왠지 으스스한 기분에 전완근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인 순간,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싶어 별은 눈을 세게 비빈 후 최대한 크게 떠보았다.
별의 유일한 낙이었던 식물들이 모두 시들다 못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뭐지? 하루아침에? 아니 단 몇 시간 만에? 왜? 대체 왜? 별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넋이 나갔다. 어떻게 키워왔던 애들인데,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거 꿈인가?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소름이 돋을 만큼 찬 기운은 온 데 간데없고 식은땀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별은 떨리는 손으로 말라서 축 처진 식물들을 하나하나 만져본다. 제일 아끼던 까슬이에게 먼저 손이 가는 건 당연했다. 직접 손의 촉감으로 확인해 보니 죽은 게 분명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혼잣말을 하며 다른 식물들도 확인하던 찰나, 새로 들여온 화분을 보고야 말았다. 별은 너무 놀랜 나머지 악! 소리까지 질렀다.
새로 들여온 ‘궁금이’는 분명, 몇 시간 만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자라 있었다.
종이컵만 했던 크기가, 두 배는 더 커진 셈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멍하니 화분들을 바라보던 은별의 얼굴 위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