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4화
주변에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도처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집주인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종일 나사가 빠진 것 마냥 넋이 나가있었다.
심지어 회의 중에는 하필 대리가 별에게 한 질문을 듣지 못해 또 욕을 먹고 말았다. 아침에 아주머니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며 혹시나, 정말 혹시나 아주머니의 죽음과 화분이 관련 있으면 어쩌나 생각하고 있었다. 가영은 점심시간이 되자 은별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권했다. 별은 입맛이 없었지만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아주머니 생각에 뇌가 말라비틀어질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누군가와 함께.
가영은 허공을 보며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고무 씹듯이 씹는 별이 신기했다.
“별아, 넌 참 애가 특이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
“어? “
“오늘따라 더 넋이 나가있길래. “
“어.. 아니. 무슨 일 없어. 출장은 어땠어?”
“그냥 뭐 과장님 비위 맞추다 왔지. 밤마다 회식함. “
“최악이네. “
“왜? 난 재밌었는데? 과장님 은근히 웃겨. “
“나보다 네가 더 특이해…”
편견도 없고 사심도 없이 누구든 애정하는 가영이가 진심으로 특별해 보였다. 가영에게 어제부터 오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까도 생각해 봤다. 지극히 현실적인 가영은 또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핀잔을 줄 것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억지로 눌러 담은 채 샌드위치 먹기를 그만두고 세입자 카톡방을 다시 확인했다. 아주머니는 정말로 돌아가셨다. 남편인 건물주 아저씨는 비현실적이면서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는지 카톡을 안 보셨다. 세입자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지만 한 명만 읽지 않은 걸로 추측해 본 결과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세입자 중에서 나름 반장 역할을 했던 윗집 아저씨가 장례식장 위치를 보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지방에 가족들이 있고 혼자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 참견이 많은 편이었다. 건물에 문제가 생기거나 세입자들끼리 논의할 문제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입주자 회의 같은 걸 열곤 했다. 무슨 아파트도 아니고 빌라 건물에서 입주자 회의냐며 빗발치는 항의도 몇몇 있었지만 금세 잠잠해졌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건지 원래 성품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는 말은 꼭 지키는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견을 빠짐없이 수렴하고 집주인 부부와 원만하게 협상을 잘했다. 이제는 사는 데 문제가 생기면 집주인 부부보다 아저씨에게 먼저 상의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집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그런 아저씨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아들처럼 대했다.
퇴근 후 바로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갈 순 없었다. 회사 근처 자라 매장에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새틴 셔츠를 구매했다. 비단 같은 것이 고급스러워 보여 눈여겨보던 제품이었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곧바로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별은 오늘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집주인 아저씨와 윗집 아저씨, 옆집 여자와 아랫집 부부 등이 반겨주었다.
“402호, 왔어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코를 찌르는 향 냄새와 장례식장 특유의 어둡지만 밝은 분위기 그리고 아침에 멀쩡히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아주머니의 영정사진. 별은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집 주인 아저씨와 맞절을 하고 아주머니 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아드렸다. 뭐든 참견은 많았지만 따뜻했던 아주머니. 별은 두 번의 절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세입자들끼리 한 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흰쌀밥과 새빨간 육개장, 수육과 떡을 하나씩 주워 먹으며 카톡으로는 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아주머니의 사망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 없이 건강하셨단다. 궁금했던 아들들의 행방은 윗집 아저씨가 해결해 주었다. 월세 받는 돈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두 아들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서둘러 귀국 중이라고 했다. 별은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맥주를 두 잔 정도 마시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치를 보다가 내일 출근을 위해 가야 한다고 운을 뗐다.
“저… 내일 출근 때문에..”
별이 출근 이야기를 하자 모두가 얼른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옆집 여자도 별을 따라나서며 택시에서 연신 고마워했다. 내일 새벽 출근인데 가야 한다고 말을 못 하고 있었다고 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가는 내내 별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을 수가 있냐느니, 엊그제 재활용 쓰레기 때문에 잔소리하길래 싹수없게 말했던 게 후회가 된다느니, 이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소용이 없다느니… 별은 그녀가 골목이나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를 해도 고개만 까딱 거리길래 말이 없는 줄 알았다. 마음이 시끄러워서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쫑알대는 바람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여자가 택시비를 계산했다. 반을 주겠다고 했더니 다음에 커피를 사라고 했다. 같이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일이 계속 피곤하게 굴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은 옆집 여자와 인사를 하고 집 안에 들어섰다. 이제야 숨통이 틔였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베란다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건너편 건물 간판들이 집안을 비췄다. 식물들은 아침보다 더 말라비틀어져있었다. 뿌리까지 생을 다한 듯 보였다.
별이는 현관문을 열고 건물 꼭대기 층에 올라갔다. 집주인 부부가 사는 층이었다.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옥상 문이 있었다. 그곳에 집주인 아주머니가 키우는 식물들이 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옥상 문을 열자마자 어둠이 별을 감쌌다. 다른 건물들보다 높은 터라 불을 켜지 않으니 어두워서 발밑도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옥상 안 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온실이 보였다. 자꾸만 손이 떨려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손에 힘을 꽉 쥐고 안 쪽을 비춰보니 가장자리에 그 화분이 보였다. 은별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질 않아 눈을 계속해서 깜빡였다.
‘궁금이’는 어느새 별의 키만큼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