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3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올라와 돈이 생길 때마다 모아둔 자식 같은 애들이었다. 납득이 안 가는 상황에도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별은 그렇게 한참을 베란다에서 온몸이 차가워지도록 주저앉아 있었다.
아끼는 식물들이 죽었다고 회사를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별은 직장인이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은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학교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진짜 가기 싫으면 쨀 수 있었는데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휴가를 쓸 수 있지만 분위기상 1년 차 신입은 집안의 경조사 아니고서야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별은 죽은 식물들을 다시 만져봤다. 이제는 시간이 더 흘러 손길이 닿은 이파리가 바사삭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몇 시간 사이에 두 배로 커버린 새로 산 화분을 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무서웠다.
대충 회사 갈 준비를 마치고 ‘궁금이’를 챙겨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게 식물계의 좀비일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건물 앞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집주인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항상 건물 뒤에 텃밭을 가꾸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나타나 잔소리를 하곤 했다.
“어머 이걸 버리게?”
“아, 네..”
“줘 봐 봐. 어머 예쁘네. 내가 키워도 돼? 멀쩡한 식물을 왜 버려~”
아주머니는 대답도 듣지 않고 별의 품에 안겨 있는 화분을 뺏어 들었다.
“이거 되게 특이하다. 처음 보는 식물이네. 어디서 샀어?”
“요 앞에.. 꽃집이요.”
“꽃집? 여기 새로 생겼어? 못 봤는데~”
“여기 편의점 골목에 생겼더라고요.”
“에? 그래? 그나저나 출근해?”
“아, 네.”
시계를 보니 여기서 더 어물쩍거리다가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면 또 대리가 하루종일 눈치와 온갖 핍박을 줄게 뻔했다. 빨리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아주머니가 먼저 약속이 있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별은 아주머니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함을 느꼈다. 지금 경보로 가면 32분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꽃집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데 주인이 있다면 뛰는 한이 있어도 뭐든 물어볼 작정이었다. 꽃집에 다다른 순간, 예전처럼 ‘임대문의’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별은 어제 일이 꿈인가 잠시 헷갈렸다. 백 번 양보해서 정말 꿈이었다 쳐도 집주인 아주머니가 화분을 가져간 건 설명이 안 됐다. 우두커니 안을 내다보고 있는데 바로 옆 상가 부동산 아저씨가 문을 열었다. 여기서 집을 구한 거라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면 스몰 토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여기 상가 관심 있어요?”
아저씨는 별에게 이런 걸 물어볼 만큼 편견이 없는 분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 꽃집 들어오지 않았어요?”
“꽃집?”
“네. 간판은 없었는데 새벽에도 무인으로 운영하고..”
“여기 안 나간 지 세 달이 넘었어요~ 건물주가 월세 협상을 안 해줘 가지고. 시세에 비해 좀 비싸요.”
“저 어제 여기서 화분 샀는데… 팝업 같은 것도 안 들어왔어요?”
아저씨는 별이의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이 동네에.”
이상했다. 분명 여기가 맞았다.
하루아침에 이사를 갔을 리도 없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부동산 아저씨가 모를리는 더더욱 없었다. 별이는 새벽부터 지금까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리가 안 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 자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28분이었다. 아저씨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떻게 회사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서둘러 출근 카드를 찍으니 3분이 오버되어 있었다. 역시나 별이 문을 열자마자 대리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비아냥 거리기 시작했다.
“어이구 오셨어요?”
출장을 갔었던 입사 동기인 가영이가 눈빛을 보냈다. 빨리 죄송하다고 하라는 눈치다. 가영이는 사회성이 좋아서 누구든 좋아하는 친구였다. 며칠간 자리를 비웠던 가영이가 미치도록 반가웠지만 일단 지각에 대한 쓴 맛 먼저 봐야 했다. 별은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늦잠을 잤다고 둘러댔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일어났던 일을 말해봤자 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또 대리가 아니어도 이해 못 할만한 일들이기도 했다.
대리는 30분이 넘도록 “나 때는 지각? 상상도 못 했어”로 운을 띄워 잔소리를 했다. 겨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PC 카톡 로그인을 했다. 가영에게 온 카톡과 가족 단톡, 그리고 세입자 단톡이 와있었다. 세입자 단톡은 건물주 아저씨가 공지사항 전달을 위해 멋대로 만든 방이었다. 웬만하면 세입자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 방이었는데, 웬일인지 40개가 밀려있었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여자와 윗집 아저씨가 대화를 나눈 카톡이었다. 별이는 너무 많아서 다 읽지 못하고 띄엄띄엄 읽어냈다. 누군가 쓰러져서 구급차가 왔다, 누군지 아냐, 무슨 일이냐 등등… 생각보다 심각한 내용에 더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다.
맨 밑 문장을 읽자 별이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입에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났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대요.
아침에 출근하다가 마주쳐서 대화도 나누고 화분도 가져간 집주인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카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