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산골영화제 후기 _숲 속에서 나를 잃고 (1)

뒷모습 바라보기

by 다이앤

퇴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즉흥적으로 영화제 일정을 잡을 수 있었을까? 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짧게 다니던 회사를 생각보다 이르게 그만두게 되었고, 갑자기 붕 뜬 시간을 메우기 위해 늦잠도 자고, 미용실도 가고 요리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도 자도 피로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피곤해해서 친구들은 ‘회사 디톡스’가 아니냐 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나고, 문득 정작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구나… 깨닫던 즈음이었다. 달이 바뀌어 달력을 바꿔 끼웠는데-달마다 낱장으로 된 달력이다- 달력 뒷장마다 해두었던 메모를 보고 나는 결심한다. 어디라도 떠나기로. 달력 뒤에는 “홀로 여행은 다녀왔니?”라고 다정과 독촉을 섞어 묻는 과거의 내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지난 겨울 서울로의 이사를 앞두고 홀로 떠났던 남해 여행에서 나는 예쁜 달력을 발견했다. 마침 달마다 한 장씩 분리되어 있었기에 나는 카페에 들러 12개의 짧은 편지를 남겨놓았다. 분주함 속에서 혹여 까먹을까 봐, 아니 까먹을 게 분명한 것들을 시기별로 가늠하며 써놓았는데, 이게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내 내면엔 혼자 여행을 할 때만 충전되는 부분이 있는데, 정신없이 소진되면서 살면 점점 더 그 존재를 까먹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방전된 부위는 녹이 슬고, 그럴수록 더욱 그 부위에 무감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데, 그렇기에 두세 달에 한 번쯤은 1박 2일이나 당일로라도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어디 갈 만한 곳이 있을까 하며 SNS를 뒤져보았던가? 내 눈앞에 ‘무주산골영화제’가 나타났다. 영화제나 음악 페스티벌을 좋아하는지라 몇 년 동안 마음속에만 담고 있던 영화제였다. 꽤나 시골에서 진행되고 서울에만 셔틀이 운영되어 그동안은 쉽게 가리라 마음먹기가 어려웠는데 서울에 와 있고 백수인 상황? 이번엔 딱이었다.


그런데 마음이야 쉽게 먹었는데 셔틀 티켓과 숙소를 예약하는 게 문제였다. 금요일 토요일은 특히나 인기가 많아 완전 매진이었다. 영화제가 주말을 끼고 월요일에 폐막이었는데, 서울발 무주행 셔틀버스는 일요일과 월요일에만 남아있었다. 우선 둘 다 예매했다. 위치 적당한 게스트하우스는 월요일에만 자리가 남아있었지만 경험상 어떻게든 일요일 숙소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월 모일 양도 이런 식으로 검색해서, 다른 영화제에서도 인기작 표를 직전에 득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번에는 커뮤니티에 아예 글을 올려두었다. 운이 좋게도 이틀 후쯤 댓글이 달렸다. 사람을 더 구해서 4인실로 예약을 하면 숙소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야호!!!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어… 들떴다. 다행히 직전에 2,30대 여성들로 4명 멤버가 다 구해졌다. 일요일 아침, 셔틀을 타러 서울역으로 향하는데 설렜다. 미지의 것들로 가득한 곳으로 향하는 그 느낌이란. 특히나 그 미지의 것들이 영화와 음악과 자연일 때 그 효과는 최고이다.



무주에 도착하니 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다. 그전에 경험했던 다른 영화제들과는 무척이나 다른 느낌이었다. 산중에 조성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유했다. 프로그램북을 구하고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차분한 어쿠스틱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히 먹을 걸 사서 무주산골영화제에서 특히 기대했던 등나무운동장으로 향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가수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다.




등나무 운동장이라는 네이밍은 정말 정직한 것이어서, 스탠드 의자들 위로 등나무 덩굴로 천장이 넉넉히 드리워져 있었다. 운동장은 푸른 잔디로 가득. 운동장 한 편엔 돔 형태의 천막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작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싱어송라이터 ‘예빛’의 공연이었다. 작은 키보드와 기타 그리고 따뜻하고 둥근 예빛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은 등나무 운동장을 채웠다. 등나무 사이로 빗물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그때 느꼈다. 무주에서의 여행이 엄청날 것이란 것을.




공연이 마무리되고 이슬 맺힌 잔디를 밟고 나와 첫 영화를 보러 향했다. 에이슬링 윌시 감독의 2016년도 작 <내 사랑>을 번역가 황석희 씨의 이야기와 함께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토킹 시네마’는 영화를 보고 한 주제에 대해 명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으로 올해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왕 영화제에 왔으니 모처럼 에헴 지적 허영심 좀 채워봐?, 하는 마음으로 토킹 시네마로 시간표를 다 채우자 결심했었다. <내 사랑>은 이미 개봉 당시 극장에서 무척 감명 깊게 본 영화인데, 무주 산골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다시 감상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 시간의 흐름이 꽤 와닿았다. 5년 전 부산에서 신입 방송이었던 내가 서울에서 PD 일을 하다 퇴사하고 그것도 무주 산골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보다니… 그만큼 자랐는지 새롭게 보이는 아름다움이 날 또다시 감동하게 했다.


번역가 황석희 씨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를 우리말의 높임법으로 표현했다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씨네필들의 여러 질문과 감상 표현도 즐거웠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심히 영화를 보고 평론을 쓰던 몇 년 전도, 홀로 떠난 전주국제영화제도, 위로를 많이 받았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도, 또 전 직장 옆 영화의 전당에서 참여했던 GV들도 떠올랐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객들이 많이 모이는 현장이 참 좋다. 집중해 작품을 감상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고, 한 공간에 있는 이들끼리만 공유하는 무언가가 생기는 그 느낌이 좋다. 영화라는 공통 관심사로 모였기에, 다들 초면임에도 ‘아’하면 ‘어’하는 그 손발이 잘 맞는 느낌이 좋다. 익숙한 친구 집에 놀러 온 듯한 아늑함. 부지런히 다니자, 또 마음먹었다.


영화의 여운을 곱씹으며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예의 그 등나무운동장에서 이번엔 밴드 데이브레이크의 공연이 열린다는데 안타깝게도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 재밌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동네 마트에서 슬리퍼를 사고, 편의점에서 우비를 사고, 젖을 만한 것들은 비닐에 꽁꽁 넣었다. 빗속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고개를 돌려 어디를 보아도 산이 보이고, 그 산에는 또 구름이 걸려있고… 마치 산신령이 된 기분이었다. 비 오는 날 산골에서 밴드 음악은 딱 잘 맞았다. 앵콜 마지막곡을 포기하고 셔틀에 올라탔다. 내가 묵을 게스트하우스 근방까지 가는 버스였다. 짐은 많지, 비도 맞았지 찝찝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다. 밤에 야외 상영하는 <라라랜드(2016)>를 볼 생각을 하니 오히려 신이 났다.



숙소에 도착해 방에 들어가니 한 분의 흔적이 보였다. 얼른 씻고 잠시 쉬는데 다른 일행 두 분이 같이 들어오셨다. 지인 사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나의 혼자 여행 루틴을 이행하려 카페로 내려갔다. 주로 홀로 여행할 때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데, 밤에는 게하에서 운영하는 카페나 펍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게 하루 루틴의 마무리였다. 이곳 게하에도 펍을 운영해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갖고 내려가 병맥주 하나를 시켰다. 행복했다… 다른 거 바랄 게 없는 순간이다. <내 사랑> 영화글을 쓰는데 또 그렇게 쭉쭉 써질 수가 없다.





얼마간 쓰고는 다시 방으로 쉬다 보니 <라라랜드> 상영 시각이 다가왔다. 운 좋게도 일행 모두가 <라라랜드>를 볼 마음이 있어서 차를 얻어 타고 덕유산으로 이동했다. 새카만 밤에 산길을 달려 영화를 보러 가다니… 비가 와 기온은 어느새 뚝 떨어져 있지만 그만큼 상쾌했고, 은은히 히터가 틀어진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자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덕유산 야외극장은 간이 무대 같은 곳에 마련돼있었다. 스크린은 안개에 살짝 싸여있었다. 우린 각자의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와인도 따라주시고 맥주도 주시고 과자도 주시도… 좋은 일행을 만난 덕에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행복이 최고점에 다다랐다.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 유명한 ‘어나더 데이 오브 더 선(Another day of the sun)’이 쩌렁쩌렁하게 산자락을 메우는데 그때부터 현실감을 잃었던 것 같다. 졸리기도 했고 맥주에 취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위기에 취했다. 그러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떨어지는 수준이다가 후드득 꽤 굵은 비가 내렸다. 우비를 다시 꺼내 입고 우산을 낮게 써 영화를 보았다. 자리를 뜨는 관객은 없었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나름의 매듭을 짓기까지 떨어지는 빗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유명한 탭댄스도, ‘시티 오브 스타즈(City of stars)’가 울려 퍼지는 신도, 미아의 독백도 모두 보았다. 촉촉한 대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그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빗소리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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