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쓰는 일을 하시겠네요

마인드셋 말하기

by 다이앤

누군가 건넨 몇 마디 말이 평생 가슴에 새겨질 때가 있다. 당시엔 뜬구름 잡는 말로 들릴지라도.


서울살이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스무 살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버스터미널 근처를 지나쳐 가는데, 행인 한 분이 길을 물으셨다. 이리저리 안내를 해드렸더니 다짜고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소리 쓰는 일을 하시겠네요.”


혹시 그다음 말이 “도를 아시나요”로 이어질까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행인 분은 이 말을 남기고 쿨하게 떠나셨다.


지금이야 ‘선견지명이 있으시구나’ 싶지만 대학 때만 해도 진짜로 목소리 쓰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나운서를 지망하긴 했지만, 많이들 그렇듯 나 또한 성인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며 한창 진로 고민이 많던 시절이 있었고, 아나운서라는 꿈 또한 일찍이 접히고 말았다.


그러던 중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마지막 학기가 되었는데, 갑자기 못다 한 꿈에 대한 미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조금 빠르게 와 주지… 아나운서가 워낙 문이 좁다 보니, 경쟁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 늦어도 대학교 2, 3학년 때부터는 준비를 시작하는 게 기본이었는데, 나는 아주 늦게 그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사실 무언가에 과감히 뛰어들 만한 기개도 없었으니, 조용히 스윽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겠다.


하지만 스스로 약간의 확신이 필요하긴 했다. 내 목소리가 과연 돈 벌어먹고 살 정도인지. 그때 도전했던 것이 바로 채플 MC였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미션 스쿨이었고, 그래서 일종의 예배 같은 것에 출석을 해야 했다. 나는 믿는 종교는 없지만, 이 채플 시간이 프로그램이 다양하여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명사를 초청해 미니 토크쇼를 여는 대화 채플이란 것이었고, 어느 날 채플 막바지에 이 대화 채플을 진행할 사회자를 공개 모집하는 슬라이드가 떴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분명 아나운서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진행자 오디션에 참여할 것이고, 나는 아직 배운 게 하나 없는 상태였기에 자신이 없긴 했다. 주눅이 드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선머슴처럼’ 옷을 입고 다녔었고, 아나운서 같은 메이크업이나 코디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종종 수업에서 발표할 때 들었던 목소리 칭찬이라든지, 동아리에서 회의를 진행할 때 친구들이 진행력을 칭찬해줬던 것들이 떠올랐다. 사람의 꿈은 칭찬을 먹고 크는 게 맞는 것 같다.


다행히 약간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해 다른 학생과 함께 30분가량의 토크쇼 사회를 보게 되었다. 대강당 2층까지 학생들이 꽉 들어차 있고 분위기는 조용을 넘어 적막했고-아침 1교시 분위기라 보면 된다-, 그 사이사이로 나와 공동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말에 따라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웃고 반응했다. 훌륭한 신부님의 메시지를 한번 더 짚고, 신부님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었다. 교목실 담당자분께서 차분하게 진행을 잘했다는 피드백을 주셨는데 내겐 아주 값진 말이었다. 배운 게 없는데도 잘 해냈으니 재능이 있구나, 내게 믿음을 좀 더 갖기로 했다. 특히 고등학교 방송부 때 스며든 어색한 ‘조’가 어느덧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들렸구나 싶어 다행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비유적이든 실제로든 간에 나를 더 큰 무대에 던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떨리는 가슴을 조금만 부여잡고 정신 차리면 값진 성장이 뒤따른다는 것을. 어떨 때는 머리에 힘을 덜 주고 ‘그냥 해보지 뭐’하는 결단이 다음의 스텝으로 연결해준다는 것을 말이다. 이 경험 덕에 나는 용기를 내어 아나운서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갈 수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애프터 양(2021)> : 그저 느끼면 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