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셋 말하기
지원하고 낙방하고의 연속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 대여를 해서 시험을 치고 돌아와 낡은 200에 30 집에서 화장을 지우고 누워있으면 왜인지 눈물이 났다. 구두 때문에 발에 물집은 잡혀있고, 집 또한 낡았다. 나의 초라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훌륭한 경쟁자들은 차고 넘치고… 아마 많은 취준생이 그렇듯 이즈음 우울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밤에는 우울함에 압도될 때가 많았기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무서웠다. 왜인지 다른 지원자들은 다 부유한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만 보였다. 몹쓸 자기 연민이 깊어졌다.
아쉬운 것은 당시엔 내게 마음의 병이 생겼다고 생각지 못하고, 그저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니까…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내 힘을 모조리 쏟지도, 포기하지도 못하고, 치유가 필요하단 것도 모른 채로 발목에 무거운 추를 매단 채로 스텝 하나 하나를 힙겹게 이행해나간 시기였다. 무기력을 등에 업고 다녔으니 한 발 한 발 참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적응이 되었다.’라고 이어가고 싶지만, 도저히 적응되는 유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력서를 써야 붙을지도 알 수 없고, 속눈썹 붙인 눈은 불편하고, 실기에 힘을 쏟아본 적이 없었던 지라 아나운싱도 좀처럼 향상되지 않았다.
딱 한번 고차 전형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지상파 3사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망한 방송사였는데, 내 이미지와 잘 맞았던지 3차 전형까지 합격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큰 실수를 하고 만다. 면접을 보다가 울었던 것이다. 그 방송사는 신문사를 겸하고 있는 곳이라, 근래에 읽은 기사 얘기를 하다가 안타깝고 부조리한 상황에 감정이 북받쳤다. 사실 면접까지 올라온 상황 자체에 이미 감정적이게 된 상태였다. 어디에서도 날 환영할 것 같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나를 픽해준 것에 큰 감격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끙끙 대며 오래 참다가, 그 끝이 보이면 눈물을 터뜨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면접날에도 이 습관이 나왔던 것이다. 결국 낙방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전형에 연속해 붙는 경험은 아주 값졌다. 힘든 날이 지속되어도 가끔씩이라도 볕 들 날이 오는구나, 불투명한 것들 투성이일지라도 시간이 그저 흐르기만 하는 건 아니고, 무언가가 그 사이에 쌓이는구나… 나를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계속 떨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나마 현실 직시 능력은 좋아졌다. 처음에는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만한 곳에만 지원했는데, 허들을 낮춰 더 다양한 곳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개 중에는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그래도 징하게 합격 소식이 없다가, 부산에 있는 모 방송국 라디오국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부산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온 상태였다. 게다가 살던 집을 직거래 사이트에 내놓아 방을 빼야 하는 날을 정해놓고, 새 집을 알아보다가 한 집이 눈에 들어 가계약을 하려던 참이었다. 전화를 받고 나는 가계약을 미루고, 그 다음날 면접을 보러 부산 친구랑 버스를 타고 나란히 부산으로 내려갔다.
자취하고 취업 준비하는 기간에 라디오는 내 생활에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깨어있는 동안엔 늘 틀어놓는 수준이었다. 라디오로 위로 받고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 라디오에 대한 이런 내 진심이 통한 것인지, 나는 시험에 최종 합격해 공채 DJ가 되었다. 짐 정리를 다 마친 서울의 방에서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목놓아 울었다. 감사하게도 친구네 집에서 하숙을 하라고 제안해주어 짐을 부산으로 부치고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왔다. 라디오 채널을 새롭게 하나 더 개국하면서 나를 뽑은 것이었는데, 개국이 얼마 안 남은 상태였다. 부산에 내려오고 며칠도 안 되어 나는 라디오팀 전체 회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