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생.명.입.니.다

마인드셋 말하기

by 다이앤

지금까지 해온 내레이션을 다 더하면 아마 양이 꽤 될 것이다. 라디오 DJ가 되고 얼마 안 돼 짧은 라디오 광고, TV 캠페인 등의 내레이션을 작업해왔기 때문이다. 그간 쌓인 원고량만 해도 꽤 많을텐데, 그 중에서도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문장이 하나 있다. 바로 “물은 생명입니다"라는 캠페인 문구. 내가 작업한 첫 라디오 캠페인의 마지막 문구이기도 하거니와, 이 작업을 정말 못해서 이후 라디오에서 들릴 때마다 에어 이불킥을 했었기 때문이다. 듣기가 힘들어서 다급하게 볼륨을 낮추곤 했다.


사실 내 목소리 톤이 사내 다른 방송인들과 겹치지 않아서 빨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경력이라든지 목소리 연기 능력은 광고 내레이션을 하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녹음 부스에 앉아서 원고를 읽는데 그 몇 줄 안 되는 문장 내레이션이 정말 힘들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니터링도 안 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라디오 진행이야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서 말을 하면 되는 건데, 내레이션을 잘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요소들, 있으면 더 좋을 기술이라는 게 있기에 차원이 다른 작업이었다. 물론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내레이션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라고 본다. 앞선 글에서 김남주 님의 뉴스 리딩 감정선이 내 시사톤 내레이션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다른 내레이션도 다 마찬가지이다. 호흡과 웃는 표정도 무척 중요하다. 어미처리를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은 더욱 완성도를 높여준다.


그런데 나는 당시에 연예인 끼가 넘치거나, 감정 표현이 능숙한 타입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감정선이 크게 오르내리지 않는데, 목소리 연기가 될 리가 없었다. 그날 부스에서 나는 로봇 같았다. 나름 예쁘게 읽으려 입술엔 집중을 하지만 아마 표정의 변화도 음색의 변화도 크게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건조한 스팟 광고가 나와버렸다.


내레이션이 어려운 점은 감정을 넣기 어려운 부분임에도 감정을 넉넉하게 써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굳건히 산을 지키는 바위'라는 문장이 있다면, ‘굳건히'라든지 ‘지키는' 같은 동사나 형용사 부사 부분엔 상대적으로 감정 잡기가 수월하다. 어떤 느낌인지 파악이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선 ‘바위’가 문제다. 웬만한 명사는 감정 잡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명사로 문장이 종결될 경우에는 더욱 난감하다. ‘굳건히 산을 지키는'까지 뭔가를 탄탄하게 지켜내는 듯한 느낌으로 읽다가, 마지막 ‘바위'에서 감정이 빠지기가 쉽다. 그럴수록 이어온 감정을 더 강조해서 써야한다.


내레이션의 어려운 또다른 점은 우리말의 특성과 연관돼있다. 우리말은 ‘어미’라는 게 존재한다. 어미 부분은 직접적으로 의미를 가진 부분이 아니기에 참 어렵다. ‘물은 생명입니다'에서 ‘입니다'의 부분을 대체 어떻게 읽으면 좋단 말인가? ‘생명'이야 그나마 감정을 싣기가 수월한 명사이지만, ‘입니다'는 사실 그냥 빈 단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그럴수록 감정을 더 풍부하게 넣어서 살려야 마무리까지 감정선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물은 생명입니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당시 초심자였던 내겐 아주 힘든 문장이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물은 생명이다', 그래서 자연을 아껴야한다는 당위적인 내용인데, 이런 내용이 특히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거부감 안 들게 설득력 있게 하려면 물에 대한 고마움, 자연에 대한 경외감, 신비감, 그리고 자연스럽고 신선한 감정 등을 섞어야하는데, 이 중 어느 하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감정이 있는가.


실제로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나서 작업한 또다른 결의 스팟 광고는 그 내용 덕분에 그나마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때는 왜 잘한지도 몰랐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BGM을 직접 들으면서 했기에 감정 잡기가 훨씬 쉬웠던 것도 있고, ‘보존’, ‘역사', 이런 내용에 어울리는 ‘비장한 감정'이 ‘자연에 대한 경외'라는 감정보다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인 듯하다.


만약 성우 학원을 다녔더라면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처리를 배울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 덕에 한 동안은 내가 못하는 게 분명한데, 대체 왜 무엇을 못하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길었다. 다행히 작업량이 늘고, 작업하는 내레이션의 성격이 다양해지면서 조금씩 감을 잡을 순 있었다. 스스로 깨우치면서 더 확실하게 습득된 점도 있을 것이다.


한번 더 강조하자면, 내레이션은, 말하기는 감정이 먼저다. 그러려면 감정을 잘 표현할 줄 알아야하고, 다양한 갈래의 갈래를 세심하게 느낄 줄 알아야한다. 건조해진 감정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면, 우리의 표현은 훨씬 풍성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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