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나이의 나무테에 줄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곤 했다. 인생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마다 그 전까지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작을 하고 싶었다. 큰 비행이 있었던 것도, 딱히 큰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색으로 치면 그라데이션이 아니라 딱 반을 가른 보색 같이 과거를 지운 채 미래를 쳐다보았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될 때는 권위가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했던, 어딘가 부자연스럽던 초등학생 나를 지우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3년 내내 모범적으로 살았다. 아래로 단정하게 묶은 포니테일에 안경을 끼고 바른 미소를 지으며 찍은 졸업 사진을 썩 마음에 들어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는 반대로 너무 모범생이었던 이미지를 버리고 어느 정도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여학생이 되고 싶어했다. 열 네 살 때에는 권위자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싶었던 것 같고, 열 일곱 살에는 또래 사이에서 만만해 보이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투명 무테 안경이 콘택트 렌즈가 되었다.
이런 습관은 20대가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하게 A처럼 살다보면 방향을 휙 틀어 B로 살고 싶어했고, 또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면 다시 A'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름 아닌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지향하려는 건강한 발전 욕구라면 과거를 부정까진 하지 않았을텐데, 사랑 받지 못하는 나와 관심 받지 못하는 나를 견디기가 어려우니, 마치 사진첩에서 사진을 도려내듯 나를 묻고 새 시작을 하려 했던 것 같다. 나를 돌아보고 취약점에서 출발하기보다는, 그냥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게 더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살다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과거의 수많은 '나'들과 조금씩 화해했다. 조금 늦은 만큼 더 힘들었다.
그래서 <아바타(2009>와 <아바타2 : 물의 길(2022)>를 연달아 보니, 다른 것들보다도 내 마음 깊이 와닿았던 건 주인공 제이크의 변화였다. 지구인에서 나비족이 되고, 나비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끝내 바다 속에서 평정을 찾는 그의 여정이 스스로와 불화하던 제이크가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읽혔던 것이다.
실제로 이를 반영하는 요소들이 있다. 2009년작에서 제이크는 끝은 곧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끝내고 나비족으로 거듭난다. 칼로 단면을 자른 것처럼 이전과 이후가 명백하게 나뉘는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후속작 <아바타2>는 산호초 부족원의 대사에 기대어 시작과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암시한다. 마치 거대한 대양에 시작점과 끝점이 없는 것처럼. 끝이 시작으로 전환되는 세계관과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은 세계관은 (끝나버린) 과거에 대해 접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가 과거가 크게 중요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 지향적이라면, 후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공히 통합적으로 아우른다. 제이크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이 통합론적 태도를 받아들이는데, 그래서 그 전까지는 큰 불안과 방황을 겪는다.
<아바타2>가 시작되자마자 나비족들은 지난 번 전투에서 겨우 지켜낸 터전을 완전히 잃고 고지대에서 은신한다.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어려운 복잡한 숲을 오르고 올라 도달할 수 있는 곳에서. 이때 고지대에서의 생활이 짧게 묘사되는데 이때 중요하게 느껴진 대목은 어린이들의 언어에 전쟁의 언어가 옮아있다는 점이다. 원래에도 전사라는 역할이 부족에서 높은 위상을 가졌겠다만, 본디 사냥과 전투는 최소한의 생활 유지나 보호 측면으로만 제한되어 있었을 테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하는 특수한 상황에 몰리니 공생이 아닌, 공격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숲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된 채로 살아가던 나비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높은 곳에 외로이 존재하여, 드나듦이 어려운 고지대라는 장소 설정처럼 위태롭고 어딘가 닫혀있다.
제이크 또한 그러하다. 자녀들에게 고압적으로 굴고, 병사를 부리듯 명령을 내린다. 존중이나 충분한 대화 없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비난하고 소리친다. 누구라도 불안해 할 상황이기도 하지만, 담대한 영혼을 가져 외지인 출신으로 부족장까지 된 것 치고는 과하게 위축되어 있고 불안해 한다. 나는 이것이 제이크가 나비족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맞이할 때, 휠체어에 앉은 과거의 자신을 가차없이 도려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와 함께 모든 걸 잃었던 과거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채로, 애도를 거치지 않은 채로, 그 과거를 버리듯 다음 단계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억압되어 있던 상실의 불안에 압도되는 것이다. 무언가에서 도망치듯 살면, 불안의 기본값이 높을 수밖에 없다. 또다시 잃으면 어떡하나, 지금 내 손에 쥔 것들을 다시 잃으면 어떡하나, 괴로울밖에.
당연히 평정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제이크는 도망을 택한다. 추격-도망 프레임에 갇힌 채 퀴리치로부터도 도망가고, 지구인 제이크로부터도 도망을 치는 것이다. 이렇게 좌절과 불안에 조종되는 제이크는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의 자녀들의 활약한다. 바다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전수 받고, 바다에 몸을 맡겼던 아이들이 말이다.
특히 대양 저 멀리 나가 모험을 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낯선 존재에 마음을 열었던 로아크가 제이크를 결정적인 순간에 구한다. 침몰한 배 속에 갇혀 나갈 길이 요원한 상태에서 생을 포기해버린 제이크의 나약해진 마음을 아들 로아크가 어루어만져주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대양을, 모든 존재를 태어나게 하고 또 거두어 가는 깊고 푸른 바다를 떠올리게 하며 제이크의 마음이 차분해지도록 돕는다. 숨이 다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로아크의 이끎에 따라 제이크는 끝내 수면 위로 나가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제이크는 이때 비로소 바다의 순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대한 순환의 장에서, 본인이 도망쳐온 것과 새롭게 쥔 것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얻는 것과 빼앗기는 것도 결국엔 하나라는 것을... 결투와 상실 그리고 수용... 제이크는 추격-도망 프레임에서 벗어나 오랫 동안 쫓기던 것에서 스스로 해방시킨다.
마지막 시퀀스가 바닷속 영혼의 나무 시퀀스라는 점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제이크가 눈을 부릅 뜨면서 엔딩 타이틀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전작과 후속작이 동일하지만, 전작의 마지막 엔딩이 '지금부터 새 시작'이라면, 후속작의 엔딩은 '지금까지'에 가깝다. 고통과 슬픔투성이일지라도 과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픔을 직면해야만 그 안의 아름다움과 치유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떠난 아들과의 과거를 추억하는 제이크의 미소는 슬프지만 영화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해 보인다. 참 아팠을 옛날의 스스로와도 차례로 화해해 나갈 것이다.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고지대에 숨어 전전긍긍하는 것과 같다. 반면 과거의 나를 수용하고, 아픔을 직면하는 것은 미지의 대양을 탐험하는 것이다. 고난이 연이을지라도 과감히 물살에 나를 맡기다보면 어느새 먼 바다이다. 멀리 나온 만큼 나의 세계는 훌쩍 확장된다. 제자리인듯 멀리 나가있고, 멀리인듯 제자리인 시간들 속에서 결국 순리를 깨닫고, 평정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선 자리에 흔들림 없이 서서 나의 터전을 지켜면서. 제이크의 마지막 대사처럼 말이다(This is where we make our stand, 이곳이 우리가 서 있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