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나라에서 죽을때까지 재미있게 살기
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즐겨하고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런 면에서 전공을 알맞게 선택한 것 같다.
독일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도시가 한국인이 살기에 정말 최적의 도시였는데, 그 시절에 이미 떡이 나오는 떡집을 보유한 -떡은 토요일에만 팔았다- 한국 슈퍼가 있었다. 지금이야 한국 온라인 슈퍼도 많고 한국식료품을 아마존이나 아시아슈퍼에서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잘 없었다.
그 도시에 살면서도 수제 어묵을 만들어서 튀겨먹거나, 탕수육을 튀기곤 했는데 독일 생활 시작부터 요리를 자주 해 먹다 보니 생각보다 보람이 있는 생산적 활동이라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요리를 하고 있다.
독일에서 산 시간들 중에 도시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시골에서 산 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먹고 싶은 한식은 요리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독일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못 먹겠다 정도는 아니지만 매일매일 먹고 싶진 않다. 다 먹고살자고 일하고 요리하는 건데, 하루 한 끼는 최선을 다해 맛있게 먹자라고 소소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 가면서 사는 중이다.
내 냉장고는 매우 작은 사이즈인데, 그 매우 작은 사이즈 냉장고에서 항상 떨어지지 않는 재료는 한국에서 가지고 오는 고춧가루이고 내가 해 둔 음식 중에 떨어질 수 없는 건 김치와 명이 장아찌 / 명이 김치이다.
명이는 철에 아주 많이 만들어 두고 일 년 내내 먹는 편이고 김치는 떨어지기 전에 자주자주 담근다.
대학을 다닐 땐 내가 같은 학기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독일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외국인인 데다가 유일한 아시아 인이었다. 그래서 음식 냄새가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한식이 지금처럼 인기가 많을 때도 아니어서 -남한 보다 북한이 더 뉴스에 자주 나왔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 남한? 이라고 묻는 시절이었다- 김치나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 한식은 금요일 토요일만 먹었었다.
대학원을 다닐 땐 도시가 좀 커지기도 했고, 스튜디오 친구들도 여러 나라 음식을 많이 접해본 상태라 조금씩 조심성을 내려두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김치를 나눠주기도 하고 한식을 같이 요리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한식냄새에 익숙해지도록. 독일사람들은 김치를 잘 받아들이는 편인데, 독일음식 중에 Sauerkraut -자우어크라우트-라는 양배추로 만든 음식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배추를 썰어서 찧어서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음식이다. 그래서 자우어크라우트를 사서 -너무 시면 물에 한번 헹궈도 괜찮다- 김치찌개 끓이듯이 끓이면 김치찌개와 비슷한 맛이 난다.
물론 고춧가루를 따로 추가해야 하지만 김치가 아쉬울 때 대체품으로 끓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독일사람들에게 약간이나마 익숙한 종류의 음식이라 그런지 김치를 생각보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매워서 고생하는 경우가 있기도 해서 매운걸 잘 못 먹는 친구들에겐 우선 김치전으로 김치를 전파한다.
독일은 유럽에서 한국인이 제일 많이 사는 나라인데, 내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살았던 도시엔 한국 슈퍼가 독일에서 제일 큰 규모로 있었다. 물론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 더 큰 마트들이 생겨서 조금 달라졌지만 국내배송비만 내고 한국슈퍼에서 재료를 주문할 수도 있고, 중국마트나 아시아 마트에도 한국 제품이 몇 가지는 있는 편이다.
지금은 아시아마트 하나도 없는 곳에 살기 때문에 가끔 한국마트에서 주문을 하거나 도시에 나갔을 때 미리 장을 봐오기도 한다. 한국을 다녀올 때 꼭 가져오는 한국식 재료도 있고, 친구가 방문을 할 때 인편으로 받게 되는 물건도 있다.
저 모든 것에서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먹는 채소류이다.
숙주는 비싸지만 독일슈퍼에서도 구할 수 있고, 아시아슈퍼에도 판다. 콩나물은 중국마트에 가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다. 콩나물을 직접 기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콩을 구하면 기르기는 쉽다고 한다. 하지만 깻잎은 한국슈퍼 아니면 구하기가 어렵고, 가격도 비싸다. 주변 한국인들을 보면 대부분 깻잎은 직접 키워서 먹는다. 키우기 쉽고 꽃이 피기 전까지 여러 번 수확이 가능해서 많이들 키우는 것 같다. 텃밭에 키워도 되고 화분에서도 잘 크기 때문에 손쉽게 키울 수 있다. 3월쯤 되면 여기저기 깻잎씨 구하는 글과 깻잎모종이나 씨 나눔 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깻잎을 수확할 때쯤 되면 쌈도 해 먹고, 찌개나 탕을 끓이기도 하고 깻잎지나 김치를 담가서 저장하기도 한다.
한국에 계속 살았으면 이렇게 까지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래 저장해 두고 먹을 수 있는 한식 반찬은 좋다. 그래서 김치를 꾸준히 담가두는 걸 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채소 중에 독일에서 시즌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가 하나 있는데, 명이이다.
독일에서 명이를 처음 봤을 때 이게 내가 아는 그 명이가 맞나 했는데, 그 명이가 맞았다. 독일에서는 명이를 주로 페스토나 버터로 만들고 여러 요리에 향이 나는 잎채소류로 쓴다. 명이 시즌이 길지 않기 때문에 그 외엔 일 년 내내 향신료 코너에서 말린 명이잎을 살 수 있다. 나는 가끔 마늘대신 말린 명이잎을 넣고 요리를 해서 점심도시락으로 싸가기도 한다.
몇 년간 명이를 싹쓸이 해가는 한국여자사람이었는데, 동료가 명이를 산다는 말을 듣더니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명이스폿에 같이 가서 명이를 직접 채취해서 온다. 따는 것도 일이지만 씻고 손질하는 건 더 큰 일이라 힘들긴 하지만 갈무리해서 명이김치, 명이장아찌, 명이나물로 무쳐먹거나 얼려뒀다가 라면이나 얼큰한 국요리에 썰어 넣으면 잘 어울린다. 명이철에는 명이 썰어 넣은 만두도 빚는데 생각보다 더 맛있어서 명이철이 지나고 나면 명이철이 언제 오나 하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독일은 감자가 한국보다 종류도 많고 단단한 정도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요리에 사용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많이 감자가 맛있는 편인데, 고구마는 그립지만 감자는 한 번도 그립지 않은 거 보면 독일감자는 정말 맛이 있는 것 같다.
한식을 많이 만들어 먹는 편이지만, 가끔 독일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나도 같이 즐기게 되는 걸 느끼면 아 여기에 적응을 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봄이 되면 명이를 찾고 명이가 지나간 자리를 아스파라거스가 채우게 되면 꼭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 이 봄을 잘 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언젠가는 시나몬향이 계절감을 갖게 되면 나는 이 나라에 조금 더 적응하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