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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un 30. 2020

남은 삶에 대한 태도

    루푸스는 매 순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숙제답게,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고, 약을 먹을 때도 먹지 않을 때도 있다. 나쁠 때에는 지금처럼 움츠린 채 살아있음에 감사해야겠지만, 좋을 때에는 또다시 꿈을 꾸고 삶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반짝이는 꿈이 아니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 정도는 마련해야 한다. 언제나 부모가 나와 함께해줄 수 없고, 나 또한 아무런 목표 없이 살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꾸어도 안전한 꿈은 어떤 꿈이고, 나를 해치는 꿈은 또 어떤 꿈일까? 늘 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것을 취해보고자 저울질한다. 수능을 앞두고, 로스쿨 입시를 앞두고 병이 크게 재발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나를 꾸준히 옭아맸다.     


    아픈 몸으로 로스쿨 진학을 고려해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하던 때, 그러니까 아픈 몸이 너무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때에 듣게 된 말이 있었다.

    "희우 씨는 자신이 곧 루푸스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로 상담을 받던 중의 일이었다. 나의 어떤 이야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오랜 질병에 대해,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던 건지 돌이켜야 했다. 어쩌면 나는 10년 전 그날부터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걸지도 몰랐다.      


    진로 상담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며 살고 싶느냐보다는 질병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이 더 시급한 숙제였다. 루푸스와 함께하게 된 후로 나는 '나'라는 사람보다는 '루푸스를 가진 나'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좁아지고 작아졌다. 이제는 투석액 줄에 묶여 그곳에서 두 발짝 나아갈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내게 허락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살아간다. 청소년기에 정하거나 주어진 그들의 키워드는 대체로 비슷한 단어 수준에서 확장된다. 나에게는 밝음, 성실함, 열정, 외향적, 솔직함, 당당함 등의 낱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루푸스가 몸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 후로 성실함을 약속할 수 없었고, 열정을 드러낼 체력이 없었으며, 자연히 당당함을 잃었다. 때론 아픔을 숨기고 솔직함 마저 감춰야 했다.      


    루푸스에 걸린 나를 제쳐두고, 오롯이 나로서의 성장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루푸스에 걸린 나도 나일 테니까. 하지만 선후 관계의 약속은 필요한 것 같다. "나는 환자라서 그런 건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하고 싶은 걸 알아채고 나서 내 몸의 조건에 맞는지 고민해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혹여 도전하고 몸에 가로막혀 좌절하더라도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의연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거 아니면 딴 거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릴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고 싶다.      


    요즘 나는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다. 10년 전 루푸스를 만난 이후로 퇴화하고 위축되고 말았던 나의 삶의 면면들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다. 글을 쓰면서, 꼭 써 내려가야만 했던 이 이야기들을 적어내면서, 묵은 감정들을 차곡차곡 잘 접어서 정리해둘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없었더라면 용기를 내어 장애인 등록을 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를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가 없었더라면, 처음 발병했을 때와 재발했을 때처럼 회피하고 또 눈물을 짓느라 바빴을 것이다.      


    루푸스는 이미 내게 왔다. 또 나는 신장 기능을 모두 잃었고, 투석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교통사고와 마찬가지로 병은 갑자기 우리에게 온다. 이제부터는 맞닥뜨린 사고를 어떻게 처리해나갈지가 중요하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주저앉아 울기보다는, 울만큼 충분히 울고 무릎을 털고 일어나 가진 만큼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나는 배워가고 있다.      


    나의 병은 평생 나와 함께인 듯 아닌 듯 함께일 것이고, 투석과 이식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 것이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겠지만, 나는 많이 울더라도 또 많이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슬픔의 시간들에서 걸어 나와 할 수 있는 만큼 웃으며 지내고 싶다. 지금 여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사랑과 기쁨들을 그러모아 나라는 사람 자체로 존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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