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입은 공주님

이혼가정 상처를 사랑으로 바꾼 순간 3

by 박다결
로버트 앙리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jpg 로버트 앙리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언젠가 똘똘하기로 소문난 여름이와 수업하던 날이었다. 세계 명작 ‘신데렐라’를 읽고 와서 책 내용과 함께 다양한 공주님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여름이는 의아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왜 공주님들은 다 드레스만 입고 구두만 신을까요? 불편할 것 같은데.”


책 내용에 제대로 몰입했는지 완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세계 명작은 물론이고 유명 애니메이션 공주님들도 드레스 외엔 다른 옷을 입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평상복이 드레스 차림이라면 당연히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식사할 때 어깨에 있는 퍼프 신경 쓰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공주님, 외출하고 돌아오면 드레스 밑단이 다 헤져서 당황하는 공주님, 구두 때문에 족저근막염에 시달리는 공주님을 상상하니 여름이의 의문에 동조하게 됐다.


“공주님이 다른 옷을 입는 것도 보고 싶어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러면 오늘은 여름이가 공주님에게 입혀주고 싶은 옷을 그려볼까?”





나는 여름이의 활동지에 마네킹 모형을 그려주었다. 잠시 후, 여름이가 가져온 활동지엔 놀라운 그림이 담겨 있었다. 공주님이 바지를 입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제복 느낌에 가까울 정도로 의상이 멋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당당한 공주님은 처음 봐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역시 이건 이상할까요? 공주님이 바지 입는 거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신경 쓰였는지 여름이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바지 입은 공주님을 마뜩잖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은 정반대였는데.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 태어나서 본 공주님 중에 가장 멋있어서 그랬어.”


여름이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말할까 봐 걱정했어요.”


여름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보통 공주님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많이들 상상하니까 말이다. 보편적인 상상을 벗어나면 이상한 것이 되어버리는 편견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어른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편견이었다.


“그랬구나. 어떤 걸 걱정했는지 알겠어. 선생님은 여름이 덕분에 더 많은 편견이 깨질 수 있어서 좋았어. 바지 입은 공주님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


나도 편견을 가진 어른에 불과했지만 여름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편견에 시선이 고착되지 않고 자기만의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여름이는 세상에 여자라서 할 수 있고, 남자라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고 생각해?”
“아뇨.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냥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맞아. 하지만 세상엔 아직도 여자가 무슨 전투기 조종사를 해? 남자가 무슨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해? 같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어쩌면 여름이가 그린 바지 입은 공주님도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 공주님이 왜 바지를 입어? 하고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걱정할 필요 없어. 여름이가 지금 한 것처럼 공주님도 바지를 입을 수 있다고 말하면 돼. 그건 공주님과 여름이의 자유니까. 내 생각과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








독서학원에서 일하다가 동료 선생님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가끔 이곳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워요. 우리 어렸을 적엔 독서학원이라는 게 없었잖아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렸을 적에 국어, 논술 학원은 많이 있었어도 독서학원은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도 이야기를 나눌 어른이 없다는 게 쓸쓸했다. 지금은 웬만한 중소도시만 되어도 독서학원이 구역마다 하나씩은 다 있으니 뒤늦게 부러운 마음이 들만도 했다. 어른들 속에만 있다 보면 속세에 때가 묻어서 마음이 늙기 쉬운데 아이들 속에 있다 보면 마음의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나 또한 아이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어른이 되어서도 동심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제론 아이들 덕에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더 많다. 여름이가 내 편견을 깨준 일화 역시 이에 해당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책을 통해서 서로에게 선생님이 된 것이다. 여름이가 지금처럼 생각과 자유를 허락받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는 어른으로 자라나길 진심으로 소망했다. 자신이 그렸던 바지 입은 공주님처럼.







*아이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이혼가정 자녀에 대한 편견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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