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다결 Oct 13. 2024

일단, 나가서 걷기

우울하니까 달려야 합니다 2



   우울만큼 오해를 많이 받는 감정이 또 있을까. 운이 좋아서 단 한 번도 우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울을 슬픔과 혼동한다. 우울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고, 넌 우울한 게 아니라는 잘못된 판단까지 서슴없이 한다.

   우울은 슬픔과 동의어가 아니다. 우울이 커다란 전체집합이라면 슬픔은 우울이라는 집합 안에 속한 부분 집합이다. 슬픔은 우울의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실제 우울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무기력, 공허함, 피로감, 예민함, 불안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우울이라는 전체집합 안에 담긴 감정의 총체는 훨씬 다양한 것이다. 그 사람이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서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고,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우울한 사람은 슬픈 상태가 아니라 방전 상태에 가깝다. 우울을 만드는 부분 집합 중에서도 무기력과 공허함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커서 일상 속에서 써야 할 에너지를 자꾸만 밀어낸다. 나를 지탱할 에너지가 바닥이 난 상태로 사람들을 만나고, 직장 생활을 하고, 모임에 참석한다고 상상해보자. 문밖에 나서는 일조차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모든 일에 용기가 필요해진다면 점점 더 편안하게 일상을 보내기 어려워진다. 밖에 나가기 어려워서 포기하고, 식사를 챙겨 먹기가 싫어지고, 연락이 피곤해져서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쌓인다. 세상과 단절되면 우울은 더 깊어지고 몸은 축 늘어진다. 그렇게 모든 에너지가 사라지고 방전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내가 우울로 크게 방전된 해는 2020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우울을 한 몸처럼 끌어안고 살아왔던 나였지만, 10대 시절의 우울과 20대 후반의 우울은 차원이 달랐다. 더 이상 무언갈 하고 싶지도 않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어서 매일같이 방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께서 바깥 활동을 너무 안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실 때마다 그냥 방 안에 있는 게 좋아서 그렇다는 핑계를 둘러댔다. 사실은 심하게 우울하고,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을 정도로 삶이 버겁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우울함을 할머니께 전이시키기 싫어서 무기력한 상태로 버티기만 했다.

   일 년이 지나고 2021년 봄, 막내 삼촌이 우리 집에 오셨다. 막내 삼촌께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셨지만 나는 예전과 다르게 억지웃음만 지었고,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었다. 꼬박 일 년이라는 시간을 우울에 허덕이느라 감정과 체력을 모두 소진 시킨 탓이었다. 삼촌은 댁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내 손에 십만 원을 쥐어주셨다.


   “기운 내고, 필요한 데 있으면 써.”


   십만 원을 받았지만,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아무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다. 맛있는 걸 사 먹겠다는 생각도, 뭔가를 갖고 싶다는 의욕도 들지 않았다. 사는 것부터 피곤하고 지치는데 계획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날 삼촌이 주신 십만 원을 서랍 안에 고이 밀어 넣었다. 언젠가 이 돈을 쓰게 될 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친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보고 싶다는 성화에 못 이겨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에 섰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신을 수 있는 신발이 반스 단화 한 켤레밖에 없던 것이다. 뒤늦게 낡은 신발을 모두 버렸단 사실이 떠올랐다. 그 흔한 운동화조차도 없이 일 년을 살았단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처음으로 세상과 단절됐다는 걸 체감했다. 이렇게 세상과 단절되는 일상에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정말로 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나를 완전히 놓아버리기 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날, 나는 딱 하나 남은 단화를 신고 친구를 만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하얀색 새 운동화를 샀다. 삼촌이 주신 십만 원으로 나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


   벚꽃이 흩날리던 4월의 봄날, 새 운동화를 신고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자발적으로 밖에 나오긴 오랜만이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다들 행복하게 봄을 맞이하는데, 나만 아직도 한겨울인 것만 같았다. 한 공간에 있어도 같은 계절과 같은 마음일 순 없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인파 속에서 홀로 뒷걸음질 치는 기분이었고, 기껏 산 운동화마저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의기소침해진 채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눈앞에 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는 걷지 않았다. 적절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여기에도 러너가 있었구나. 그가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내 앞을 지나간 사람 말고도 러너가 더 있었다. 나이, 성별, 옷차림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생동감 넘쳤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하는 러너들의 모습은 무기력하던 내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여태껏 운동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처음으로 나도 한번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저렇게 여러 사람이 달리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달리기만의 기쁨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무엇보다 정체된 것 같은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어차피 이 깊은 우울에서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고,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걷기 운동에 돌입했다. 우울을 떨쳐내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극심한 우울에 시달리는 이에게 늘 따라붙는 조언이 있다.


   우울하면 운동하세요.


   무기력에 잠식된 상태에서 받은 운동 권유는 마치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나도 한창 우울로 버거웠던 시절엔 운동하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밥을 챙겨 먹는 것도 귀찮고,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피곤한 상태에서 운동할 에너지가 어떻게 생기냐며 따지고 싶었다. 당시 이 조언에 유독 반발이 심했던 이유는 잘못 고착된 운동 이미지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한 운동이란 ‘진천선수촌에 들어갈 수준의 격한 운동’이었다. 10kg 쌀 포대를 질질 끄는 것조차 힘겨운 유리 몸으로 도전할 수 있는 운동은 없었다. 그래서 운동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치를 떤 것이다. 나에게 그만한 에너지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울한 사람과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운동 시작 강도가 다르단 점이다. 남들처럼 운동하라는 뜻으로 던지는 조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미션이라도 완수하라는 뜻으로 던진 조언이라는 걸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우울한 사람에게 하는 운동 조언엔 이런 단서가 붙는다.


   우울하면 운동하세요.
자, 오늘은 아파트 단지 한 바퀴만 걸어볼까요?


   우울해지면 작은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거대한 무기력, 공허함에 신체가 압도되기 때문이다. 이건 나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의 배선이 꼬여서 생긴 문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의 우울은 반드시 병원 진료를 권하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작은 일을 하나씩 수행하는 것만으로 꼬여있던 뇌의 배선을 느슨하게 풀 수 있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영특해서 꼬인 걸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예전보다 우울감을 덜 느낀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도는 건 작은 미션이지만, 이를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쌓이면 우울과 멀어진다.






   나도 처음부터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걷기부터 시작했다. 걷기는 모든 운동의 기본이다. 걸을 수만 있으면 누구나 달릴 수 있다. 내가 달리기로 넘어가기 전에 시행했던 3단계 걷기 방법이 있다.


   첫째, 집 근처에서 걸어보기. 처음부터 풍경이 좋은 장소에서 각 잡고 걸을 필요는 없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 근처를 한 바퀴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도 달리기에 도전하고자 밖으로 나갔던 첫날엔 집 근처만 돌아다녔다. 더는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라서 지겨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흥미롭다. 집 근처에 어떤 꽃이 피는지, 어떤 새소리가 들리는지, 어떤 강아지가 산책을 나오는지 지켜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걷게 된다.

   둘째, 공원에서 걸어보기. 집 근처에서 걷기가 익숙해지면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본다. 같은 장소만 걸으면 지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에 가보는 것도 좋다. 공원엔 러너들도 있어서 좋은 달리기 자세도 볼 수 있고, 나도 언젠가는 달리고 싶다는 꿈을 꾸기에 최적의 장소다.

   셋째, 좋아하는 장소에서 걸어보기. 가끔은 이벤트성으로 특별한 장소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나는 이럴 때 절을 찾는다. 집에서 30여 분 떨어진 곳에 유명한 절이 있어서 요즘도 우울이 몰려들 때면 무작정 버스를 타고 이곳을 찾는다. 숲에서 나는 청명한 향기, 정신이 깨어나는 목탁과 풍경소리, 고즈넉한 절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나처럼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에 찾아가서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 마음이 가는 곳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우울할수록 나를 방이 아닌 밖에 두어야 한다. 방안에만 있으면 우울에 잠식되기 쉽지만, 밖에 나가면 벤치에만 앉아있더라도 덜 우울하다. 방은 혼자만의 공간이지만, 밖은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햇볕과 바람, 풀냄새와 꽃내음,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밖을 걸으며 나에게도 주어진 자연의 공평함을 누리면 우울함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혼자 고립되지 않도록 자연이 곁에서 도와주는 셈이다.

   설령 달리기까지 가지 못하고 매번 걷기만 하더라도 괜찮다. 밖에 나가서 걷는 것부터 이미 우울을 떨쳐내는 중이란 증거다. 그러니, 일단 나가서 걸어보길 바란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질지도, 생각보다 더 멋진 풍경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삼촌이 주신 십만 원으로 덥석 새 운동화를 샀던 것처럼, 공원을 달리는 러너들에게 시선을 빼앗겨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처럼 우울이 옅어지는 순간은 나의 선택과 뜻밖에 우연이 겹쳐질 때 찾아온다. 그런 꿈같은 순간을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길 바란다.

이전 01화 우울을 이기는 정신과 신체 균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