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이 지나간 자리
인성과 애경은 조금 더 넓은 방으로 이사했다. 여전히 단칸방이었지만,
천정 끝에 다락이 딸려 있었고
방을 갖고 싶다던 딸아이의 꿈을 이뤄줄 수 있었다.
“이건 내 방이야!”
다락에 올라가 이불을 펴고 깔깔 웃는 아이를 보며, 애경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 웃음 하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공장도 번창해 직원도 여러 명으로 늘었고,
아침마다 톱밥 냄새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운동장에 선 아이를 보자 애경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나에게도 이렇게 좋은 날이 오는구나.’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축복 같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야속한 하늘의 호의는, 거기까지였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하늘은 오래 삭인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며칠 내내 폭우를 퍼부었다. 처음엔 소나기려니 했다.
그다음엔 장마가 아직 안 끝났겠거니 했다.
그러나 비는 점점 거세져, 그칠 줄을 몰랐다.
물은 골목을 타고 밀려들었고,
검은 강처럼 불어난 빗물이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인성은 혹여나 지하 공장에 물이 들까,
며칠 밤을 뒤척였다.
그러던 어느 새벽.
유난히도 웅성이는 골목 밖 사람들의 소리에 문득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여니, 마당은 이미 대문을 넘어온 빗물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방 안까지 들이닥칠 기세였다.
겁이 났다. 지금껏 이루어 온 모든 것이, 다시 한순간에 또 무너질까 두려웠다.
인성은 조용히 애경을 깨웠다.
“여보, 애경아. 우리 큰일 난 것 같아. 빨리 피해야 돼.”
잠결에 눈을 비비던 애경은 인성의 다급한 표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래? 오빠.”
“비가 마당까지 찼어. 조금 있으면 방까지 들이닥칠지도 몰라. 중요한 것만 챙겨서 어서 나가자.”
애경은 문 밖 마당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떡하지. 뭘 먼저 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애경은 문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인성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경아!”
그제야 애경의 귀에 물소리와 천둥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그 소리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애경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얘들아, 일어나 봐. 우리 학교에 놀러 가자.”
“으응… 엄마, 아직 캄캄한데…”
“괜찮아, 엄마랑 가면 돼. 친구들도 다 모였을 거야.”
아이들을 깨우며 애경은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인성과 애경은 옷가지 몇 개와 서랍에 숨겨둔 통장, 계약서, 그리고 돌반지를 급히 짐가방에 챙겨 넣고 곧장 임시대피소인 학교로 향했다.
아이들은 철없이 온 세상이 강이 되었다며 마냥 해맑았다.
그 사이, 지하 공장은 순식간에 물의 집이 되어 잠겨버렸다. 손쓸 틈도 없이 인성은 다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학교 강당으로 대피한 그 밤.
눅눅한 바닥에 앉은 애경은,
구호물품으로 크레파스를 받아 신난다며 그림을 그리는 딸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앞은 흐려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몇 달 전 입학식에서, 바로 이곳에서
형님이 되었다며 으스대던 딸아이였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울음소리가 밤을 새웠고,
창밖으로 내려다본 마을은 지붕만 남아 있었다.
애경은 걱정하고 있을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어떡해. 집이고 공장이고 싹 다 잠겼어. 어쩌면 좋아 언니. 인생이 왜 이래.”
“막내야!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일단 비 그치면 우리 집에 와 있어. 애들을 거기서 지내게 할 수는 없잖아.”
비교적 높은 지대였던 명심의 집은 인성과 애경의 피난처가 되었고, 며칠이 지나도록 창밖은 검은 물과 지붕뿐이었다.
물이 빠지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집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옷장은 배를 불려 문을 다물지 못했고, 가전은 축 늘어진 채 물을 뿜고 있었다.
공장은 더 처참했다. 스펀지는 물을 머금고 늘어져 발목에 감겼고, 가죽은 얼룩을 문신처럼 새겼다. 나무는 속까지 젖어 처음의 형태를 잃었다.
몇 년을 버티며 이룬 것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자리. 인성은 시커멓게 젖은 벽을 등지고 앉아 천장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애경도 진흙으로 얼룩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오빠.”
“응.”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짧은 질문에 인성은 더 짧게 답했다.
“어떡하긴. 살아야지.”
그 처참하고 조용한 곳에는,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둘의 가슴을 울렸다.
삶이 나를 끝없이 무너뜨려도,
나는 끝내 다시 일어 선다.
-인성쇼파공장, 그 시절의 기록 -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실화 소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