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동물을 대하는가
도서관 냥이 봄이 이야기
우리는 어떻게 동물을 대하는가 - 도서관 냥이 봄이 이야기
싸복이 남매와 함께하고 길냥이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하게 어디를 다녀도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불쌍한 동물들 뿐이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싸복이 남매와 함께 살기 시작한 시점에, 내 주변에 불쌍한 동물이 더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닐 텐데. 매번 아는 척할 수 없어 대개는 모른 척 그냥 지나치기 마련인데, 이렇게 불쌍한 동물들을 그냥 지나쳐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도 길냥이들이 은근히 많다. 우리 학교 길냥이들은 여타 길냥이들과는 다르게 제법 여유가 있다. 추정컨대, 젊은 학생들은 대개 길냥이들에게 우호적이어서, 음식을 얻어먹을 기회도 많고 해코지하는 일도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학교에서 마주친 길냥이들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다. 내 집에서 거둬먹이는 길냥이들 만으로도 숨이 벅차,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조치라고나 할까. 그랬던 나에게 고양이 '봄이'는 어쩌면 특별한 경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인가부터 도서관 열람실에 고양이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고양이를 예뻐하는 알바가 전해준 이야기다. 매번 열람실에 들어와서 먹을 걸 얻어먹기도 하고, 학생들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있기도 한다고 했다. 하도 이야기가 자주 들려 청소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매일 들르는 데 완전히 개냥이 중에 개냥이란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버린 아이 같다고도 하셨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람을 따를 수가 없다 하시면서. 다리가 불편해 보인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보니, 봄이에게 크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밥은 먹고 다니나. 도서관에서 저 아이를 키울 수는 없을까. 집으로 데려가야 하나. 왜 하필 도서관에 찾아들어 왔을까. 그러다 드디어 봄이와 마주쳤고, 그때 마침 여분의 고양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 누가 해코지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마침 그 목걸이에 '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자연스레 봄이가 되었다.
그날 이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봄이나 어찌나 심한(?) 개냥이던지, 목걸이에 적혀 있는 내 전화번호로 시시때때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이 주인이세요?'라고 걸려오는 전화에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로 시작되는 일장연설도 한두 번이지 매번 설명하기가 매우 난처했다. 문자도 쇄도했다. 새벽 2~3시 야심한 시각, '고양이가 지금 대로변에 위험하게 나와있어요~' 같은 문자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면 부재중 전화가 몇 개씩 꼭 찍혀있곤 했다. 고양이 주인을 찾아주고픈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갸륵했으나, 호의로 목걸이를 매어 준 나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사실은 봄이가 주인이 있는 고양이라는 것이다. 봄이는 학교에서 나름 유명해져서 페북이나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어플에 사진이 많이 올라갔다. 페북의 한 댓글에 의하면 이랬다. 봄이는 자신의 친구네 집 고양이인데, 수술을 해서 집에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지 고양이가 집을 너무 자주 나간다는 것이다. 대도시에서 고양이가 그냥 외출을 하도록 놔둔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 쳐도, 고양이가 가출을 자주 한다면 당연히 목걸이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케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주인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무렵 걸려오던 전화가 딱 끊어졌기에 무사히 집에 돌아갔구나 하고 안심을 했고, 시간이 지나 봄이의 존재도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흐른 후, 전화가 다시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추정컨대, 봄이가 다시 가출을 한 것이다. 순간 짜증이 일었다. 아니, 고양이가 집에 돌아왔으면, 당연히 내 목걸이를 풀러야 되는 거 아닌가. 버젓이 거기 내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걸 봤을 텐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봄이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는 있는 건가? 주인이 맞기는 한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별 수 없이 전화를 받았을 때 달려 나가 봄이의 목걸이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봄이는 어찌나 애교가 많던지, 냉큼 내 무릎에 안겨 좀처럼 내려가질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리도 불편해 보이고, 손톱도 너무 길고, 때가 꼬질꼬질한 것이, 누가 봐도 케어 받고 있는 냥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충분하게 사랑받고 있다면, 굳이 그렇게 기를 쓰고 가출을 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러모로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엄연하게 주인이 있는 아이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무릎에서 내려놓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무겁고 또 무거웠다. 봄이가 나의 뒤를, 백여 미터 이상을 졸졸 따라왔기에 더욱더 그랬다. 이것이 지난가을의 일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 더 이상 봄이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봄이는 주인 곁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씁쓸한 추억이다.
사람마다, 문화마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같은 동물이라도, 반려동물이냐 아니냐로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다 저마다 소중하며,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한 이상, 함께하는 동물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람마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과 신념이 다르기에 타인의 방식을 틀리다고 말할 수도, 내 방식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저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매번 봄이 같은 아이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봄이 사건을 겪으면서,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더욱더 깊어졌다. 과연 무엇이 정답인 걸까.
그나저나, 사람을 그토록 좋아하던 봄이는, 잘 지내고는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