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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May 28. 2021

꼬꼬마 강아지 '복동이' 이야기

'복동이'가 진정 '복덩이'가 되기를

여느 때처럼 싸복이 남매와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린 우리 집 대문 사이로 마당에 앉아있는 강아지가 보인다. 강아지를 발견한 싸복이 남매가 난리가 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싸복이 남매를 얼른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사태 파악을 해 본다. 덩치가 제법 있지만, 아무리 봐도 2~3개월령의 아기 강아지다. 얘가 왜 우리 집 마당에 있는 걸까. 나를 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눈 밑에 붙어있는 새끼손톱만 한 '어마 무시한' 크기의 진드기다.


처음엔 정말 개꼬질했다. 이때만 해도 내보내야겠다고 독하게 마음먹고 있었다

우리의 첫인사는 눈 밑 진드기를 떼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를 보고 겁먹어 뒷걸음질 치긴 했지만, 아직 너무 어려 쉽게 저항(?) 하지 못했고, 나는 급한 대로 진드기를 떼 주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직 꼬꼬마다(대형견 새끼로 보였다). 어디서 온 아이일까. 누구네 집에서 잃어버린 귀한 강아지라면 눈 밑에 저렇게 큰 진드기를 붙이고 있을 리가 없다. 누가 우리 집 마당에다가 버린 걸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뒷산에 유기했나?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차 밑에서 나오지 않았다. 복동이는 어쩜 처음부터 나를 점찍었는지도.

그렇다고 덜컥 집안에 들일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집에 들이는 순간, 어떻게 코가 꿰일지 알 수 없다. 독한 마음을 먹고 그냥 집 밖으로 내어놓기로 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평소대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자꾸 새끼 강아지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죄의식 때문에 환청이 들리는구나' 싶었다. 그렇다. 그때까지는 환청인 줄만 알았다.


뒤뜰 냥이들 밥을 챙기러 갔는데, 어떻게 어느 구석으로 들어왔는지 뒤뜰에 떡 하니 앉아있다. 그렇다. 그것은 환청이 아니라, 실제 뒤뜰에서 들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 싶어 망연자실한 그때, 강아지가 다 썩은 은행알을 주어먹기 시작한다.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사료와 물을 챙겨주었다. 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문을 열고 다시 강아지를 밖에 내어 놓았다.


'백구+골댕이'처럼 보이는 개성 넘치는 외모를 가진, '시고르자브종 빅 독' 복동이

그런데 내 차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급기야는 차 밑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때는 5월 8일 토요일 어버이날, 잠시 후에 차를 끌고 시골집에 내려가야만 한다. 그때 느낌이 왔고, 포기가 됐다. 이 아이가 결코 돌아가지 않겠구나(아니 돌아갈 곳이 없구나), 결국 내 몫이구나 하고. 집에 데리고 들어가야겠다고 맘먹고 보니, 강아지가 너무 꼬질꼬질하다. 자세히 보니 온몸에 새까맣게 진드기가 붙었다. 일단, 되는대로 진드기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거짓말 조금 보태 수백 마리는 뗀 것 같다. 


토실토실한 뱃살, 보드라운 발바닥, 넘나 사랑스러운 아기강아지 복동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에서 잃어버린 아이 일리가 없었다. 풀숲이나 산에서 며칠을 머무르지 않고서야 저렇게 진드기 범벅일 수가 없다.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급한 대로 시골집엔 늦을 거란 전화를 하고, 목욕을 시켜 안방에 격리했다. 예상대로 싸복이 남매는 대 환장을 했지만, 일단 시골집으로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싸복이 남매 왕 심기 불편한 중, 철없는 복동이는 그저 싸복이 남매가 좋아 죽음.

모든 시에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가 있다. 안락사를 시행하지 않는 보호소도 존재하지만, 대개의 보호소들이 14일의 공고 기한 이후에는 안락사를 시킨다. 나는 평소 떠돌아다니는 개들을 만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도 애써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보호소를 보낸다 해도 안락사당할 확률이 높고, 내가 어디 입양 보낼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매몰차게 강아지를 문 밖에 내어놓은 것은, 보호소로 가서 안락사를 당하느니,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늘이가 엄청 싫어해 하루 동안 구석에 짱 박혀 밥도 안 먹고 츄르도 거부했다.

집에 들이는 순간, 내 책임이 되는 것도 마음이 무거운 일이다. 혼자 살면서 싸복이 남매와 하늘이, 뒤뜰에 냥이들까지 내 어깨가 너무 무겁다. 도저히 더 이상 식구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기 강아지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엔 불쌍한 동물들이 너무나 많고, 내 능력은 한계가 있다. 동물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삶을 살면서,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자제력이 필요하다고 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왔다.


옷장 안에서 잠든 복동 씨.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런 부담스러운 마음이 저기 멀리로 달아날 만큼 강아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직 너무 애기라 그저 똥꼬 발랄 천방지축이어서 더 예뻤다. 행복이가 딱 요맘때, 요만한 크기로 우리 집에 왔는데, 그때의 행복이를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감회가 새로웠다. 강아지는 죽어라고 싫어하는 행복이를 유난히 따랐다. 엄마와 비슷한 덩치여서 인 듯했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내면의 갈등은 더더욱 커져갔다. '그래, 그냥 내가 키우자, 보호소로 데려다줘야 한다' 사이에서 1초 단위로 생각이 널뛰기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선택하기 어려웠던 결정이 있었을까 싶었다.


원근법 때문에 복동이 엄청 크게 나옴(몸무게 3.4킬로 우량 아기 강아지)

소형견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내 집에 들어온 아이를 품었을 것도 같다. 대형견을 새끼 때부터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내가 가장 잘 안다. 몸집이 벌써 예사롭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클지 예상이 불가능하다. 더더군다나 산책은 어찌할 것인가. 대형견 두 마리에 소형견까지, 내가 혼자서 세 마리를 산책시킬 수 있을까. 싸복이 남매는 이제 9살이나 되었다. 안 그래도 관절이 안 좋은 행복이는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행복이를 생각하면 절대 식구를 늘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월요일 오전에 강아지를 보호소(병원)에 데려다 주기로 결정했다.


장난감 가지고 놀다 쓰러진 복동이. 아기 강아지는 자고 자고 또 자고 또 잔다.

그래도 이름은 지어줘야지 싶었다. 처음엔 '담이'로 지었다. '대담하게 남의 집 마당에 침입했다'는 의미였다. 지어놓고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소중한 생명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한 이름이 '복동이'였다. 굴러들어 온 '복덩이'라는 의미에서. 저 아이는 어쩌면 하느님이 내게 내려주신 귀한 생명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복덩이'가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지어놓고 보니 보면 볼수록 어찌나 '복동이' 스럽게 생겼는지.


병원쌤이 복동이를 보곤 '귀여워서 어쩌면 입양이 될 수도' 했는데 쌤 말이 맞았다.

월요일이 되었다. 중간에 잠깐 보호소에 다녀오려고(안성시 보호소는 마침 나의 단골 병원이다) 복동이를 데리고 출근했다. 복동이는 귀여운 외모로 한눈에 팀장님을 사로잡았고, 팀장님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입양할만한 데가 없는지 알아봐 주시기로 했다. 몇 다리 걸러서라도 아는 사람에게 입양을 가는 것이 더 좋지 싶었다. 나 역시도 최대한 인맥을 끌어모아 여기저기 입양처를 알아보았다. 제발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우리의 간절한 바람에도 입양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더 내 곁에 머물렀던 복동이는 결국 다음날, 보호소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직장 사무실 바닥에서 노숙 중인 복동 씨. 혼자 있음 찡찡대서 돌아가면서 돌봐줌.

다음날 병원에다 복동이를 맡기고 돌아오며 참 많이 울었다. 아직 어려 혼자 있으면 찡찡거리는데 비좁은 케이지에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입양이 되지 않으면 꼭 전화해 달라는 말을 신신당부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삼일이란 시간 동안 복동이에게 너무나도 정이 많이 들었다. 대형견 새끼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쉽게 나타날까. 아니, 이상한 집으로 입양이 되면 어쩌지.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아이를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보내고 나서도 계속해서 마음은 무거웠다. 포인 핸드에 복동이 공고가 올라왔다. 입양을 위해 뭐라도 해볼까 싶어 포인 핸드에 별도로 공고를 올렸다. 예쁘게 나온 사진과 함께.


복동이가 개 거슬리는 행복이. 좀 품어주면 좋으련만, 행복이 답게 엄청 싫어함.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동이는 입양이 되었다. 내게 전화 문의 온 사람에게 입양이 되었는지, 아니면 병원에 문의한 사람에게 입양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복동이를 데려간 사람이 좋은 사람일지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복동이의 입양을 바랐던 만큼, 아이러니하게 또 입양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 집 식구가 되기를 은근슬쩍 바랬다. 2주 후 병원에 전화해보니, 복동이가 입양을 갔단다. 마음이 참 헛헛했다. 핸드폰 속의 복동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복동이가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아, 저 오동통한 궁둥이를 어찌할까. 복동이가 많이 보고 싶다.

근 보름간을 복동이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새벽에 눈을 뜨면 비몽사몽 간에도 복동이 생각이 먼저 났다. 많이 외로울 텐데, 많이 울고 있을 텐데,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근에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는 집이 없고, 저맘때 강아지가 엄마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복동이는 유기된 강아지임이 틀림없다. 사람이 참 잔인하지 싶다. 저렇게 어린 생명체에게,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그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현실이, 참 서글프다. 


복동이가 진정 '복덩이'가 되어 어딘가에서 행복하길. 인간으로부터 버려지는 강아지들이 없는 세상을 꿈 꾸며.

지금도 가끔 핸드폰 속의 복동이를 본다. 아기답게 똥꼬 발랄 놀다 갑자기 쓰러져 잠들던, 진드기 잡아주는 와중에도 내 품에서 잠들곤 했던, 작고 어리고 예쁜 생명체 복동이. 복동이가 어딘가에서 진짜 '복덩이'가 되어 사랑 많이 받으며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고 많은 집 중에서, 하필 나의 집을 찾아온 걸 보면, 복동이는 분명 대운을 타고난 강아지가 틀림없다. 어딘가에서 분명 '견생 역전'의 드라마를 찍고 있을 거라 믿어본다.


미안하다 복동아, 보고 싶다 아기 복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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