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산다. 싸이와 행복이. 나는 얘들을 줄여, 혹은 붙여 '싸복이 남매'라 부른다. 사람들이 묻는다. '둘 중 누가 더 예뻐?'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흔히 이야기한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그런 이야기도 한다. '더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라고.' 싸복이 남매는 나에게 깨물면 똑같이 아픈 손가락이지만, 행복이는 조금 더 특별하고도 아픈 손가락이다.
우리 싸이는 장남 같다. 자식을 키워보진 않았지만 첫아이가 있다면 저런 느낌일 듯싶다. 한마디로 책임감 강하고(그렇게 열심히 집을 지킨다), 사려 깊다. 나의 감정을 늘 헤아리고, 엄마가 싫은 짓을 해도 꾹 참아주는 게 눈에 보인다. 행복이에게도 늘 양보해주며, 배려심 있게 살펴준다. 안 그래도 똑똑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어 손갈데 없는 강아지가 기특하기까지 한 것이다. 행복이는 그 반대다. 사고뭉치에 말귀 못 알아듣는 멍청함까지. 엄마의 감정 같은 건 나 몰라라. 집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조금도 없고. 배려심이나 양보라는 단어는 모르는 단어. 그래도 해맑고 똥꼬발랄해 하는 짓이 결코 밉지 않은 것이 우리 행복이의 매력. 친구들이 말한다. 싸이는 전생에 나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나는 행복이에게 큰 은혜를 입었을 거라고. 그래서 현생에서 내가 싸이한테 복을 받고, 행복이에게 복을 베푸는 거라고.
행복이는 아직 어린데도 고관절염을 앓고 있다. 딱히 치료방법이 없다. 언제 주저앉을지 알 수 없다. 주말마다 나는 부지런히 싸복이 남매를 데리고 목줄 없이 산책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행복이를 보고 싶어서다. 엄마가 부르면 한걸음에 달려오는 행복이를 보는 것이 기쁘면서도 슬프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고, 언제까지 저렇게 뛸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건강한 행복이의 모습을 맘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주말이면 기꺼이 길을 나선다.
당연하게 다이어트와 운동은 필수다. 스스로 관리할 수 없으므로 온전히 나의 몫이다. 게다가 행복이는 잔병치레도 많다. 늘 병원문턱을 들락거린다.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 이만하면 가히 더 아픈 손가락이라 할만하지 않은가.
이년 전 여름, 나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세상을 향한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그때, 유일하게 날 잡아주었던 건 바로 행복이었다. 행복이가 눈에 밟혔다. 싸이는 누구라도 맡아서 키워줄 수 있는 강아지다. 작은 데다가 손댈 데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이는 보낼 때가 없었다. 체중 30킬로. 고관절염에 걸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강아지. 똥오줌도 못 가리는 바보. 평생 다이어트가 숙명인 아이. 내가 죽으면 도대체 누가 행복이를 거둬줄 것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당시 행복이는 막 고관절염을 진단받고 10킬로 감량을 의사로부터 권고받은 상태였다. 나는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하루 두 번 행복이와의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세월이 무섭다. 2년이 지난 지금 한때 죽을 것 같았던 열병의 시간도 다 지나갔다. 지금은 행복이 눈을 맞추며 이야기한다. '너 때문에 엄마가 살았는데, 나 책임져야 해.' 이렇게. 강아지 때문에 산다고 하면 분명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싸복이 남매 덕에 산다. 삶의 분명한 의미가 있는 사람은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두 가지 의미로 산다. 첫째,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둘째, 싸복이 남매, 특히 행복이를 책임지기 위해서. 행복이는 나에게 너무나도 '특별한' 강아지인 셈이다.
나이 들어 언젠가 주저앉을 행복이. 그런 행복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힘겹다. 언젠가 내 곁을 훨훨 떠나갈 싸복이 남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반려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무지개다리 건널 때, 함께 살던 반려견이 마중을 나온다는 이야기. 저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뭉클했고 또 묘하게 위안이 됐다. 죽음도 덜 무서워졌다. 싸복이 남매가 나를 마중 나올 것이므로.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싸복이 남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볍다. 나의 보금자리, 우리 집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싸복이 남매가 있어 오늘도 힘을 낸다. 싸복이 남매를 통해 길들이고 책임지는 것의 의미를, 생명의 소중함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배웠다. 아니 지금도 배우는 중이다. 그렇게 나는 싸복이 남매와 함께하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선물처럼 내게 다가와 일상을 더욱 특별하게 해 준 싸복이 남매. 얘들아, 엄마가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