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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Oct 17. 2017

뭉치는 어쩌다 길냥이가 되었을까

뭉치는 '러시안 블루'라는 품종 묘다. 


정확히는 몰라도 제법 값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아주 작고 (한 3킬로)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누구라도 한 번에 반할만한 자태다. 이런 뭉치가 어쩌다가 길냥이가 되었을까. 처음부터 아무 거부감 없이 내 손을 탔던 걸 보면 틀림없이 사람이 키우던 '집냥이'였을 것이다. '러시안 블루'가 처음부터 길냥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더군다나 사람에 대한 경계가 눈곱만큼도 없었던 걸 보면 집냥이였을 확률이 99.9%라고 본다. 


사진상으로는 표현이 잘 안되는데 재색도 회색도 아닌 털 색깔이 너무 신비롭고 이쁘다.

그렇다면 뭉치는 어쩌다가 길냥이가 된 걸까. 슬픈 일이지만 주인이 키우다 버렸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본다. 우리 동네는 전형적인 시골마을, 개도 집안에서 키우는 집이 하나도 없는 동네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잃어버렸을 확률은 매우 낮다. 멀리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유기했을 가능성도 상상해 본다. 참으로 잔인한 게 사람이지 싶다. 사람들은 왜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버리는 것일까. 쓰던 물건이 필요가 없어져서 버리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일일 텐데. 인간이 가진 추잡한 민낯이다. 자신보다 힘없고 약한 존재는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는 오만한 생각. 나는 이런 인간들이 참 싫다.


쓰다듬어 주면 '갸르릉' 소리를 내는 뭉치.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라고 한다.

'묘연(猫緣)'이라는 말이 있다. 뭉치와 나의 인연이 '묘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뒤뜰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 뭉치가 먼저 내게 손을 내민 것 아닐까. 뭉치가 내민 손을 내가 덥석 잡았으니 앞으로도 그냥 모른 척해서는 안 될 일이지 싶다. 유기동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건 온통 불쌍한 동물들 뿐이다. 짧은 목줄에 묶여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한 채로 비참하게 사는 강아지들, 길 위의 삶이 고단하기만 할 길냥이들. 비단 강아지나 고양이뿐이겠는가. 털 때문에 고통당하는 모피나 라쿤, 산채로 털을 뜯기는 거위나 오리의 삶은 또 어떠한가. 인간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는 동물들의 비참한 삶이 눈물겹다.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일까.


살면서 만난 동물들이 안쓰럽다고 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내가 이 세상의 불쌍한 동물들을 다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눈감고 모른 척하며 산다. 불쌍하다고 거둬들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러다가는 자칫 '애니멀 호더'로 전락할 수도 있다. 유기동물과 관련해서 늘 고민이 많았는데, 뭉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결심을 굳혔다. 내게 먼저 손을 내민 동물들은 모른 척하지는 않겠다는 것. 마음이 가는 일에 '돈'을 앞세워 앞뒤를 재지는 않겠다는 것.


푹신푹신한 곳만 찾던 뭉치. 편하게 몸 누일 곳 없는 길냥이 생활은 얼마나 험난할까.

아침마다 내가 사료를 채우기를 기다리는 길냥이가 있다. 나는 이 아이를 '늘보'라고 이름 붙였다.(몰래 유심히 지켜봤는데 '나무늘보'처럼 매우 느리게 움직여 지어 준 이름이다.) 우리 집밥을 먹는 길냥이가 여럿인데, 늘보는 요 몇 개월 동안 아침마다 밥을 기다리고 있는 치즈 냥이다. 아침에 늘보 눈치가 보여 보일러실에서 뭉치에게 통조림 캔을 따주는데 나를 피하는 녀석이 냄새가 났는지 다가온다. 순간 많이 미안해서 늘보에게도 통조림 캔을 주었다. 뭉치와 연을 맺으면서 매일 보던 늘보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늘보도 어쩌면 내가 다가온 '묘연'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뭉치가 먹다 남긴 캔을 먹고 있는 '늘보'와 그런 늘보를 감시하는 듯한 '뭉치'

마당 있는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싸복이 남매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거리의 동물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 집 뒤꼍은 길냥이들의 천국이 돼가고 있다. 더불어 내 어깨에 놓인 짐도 무거워진다. 이젠 길냥이 통조림 값도 걱정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무거워진 어깨가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싸복이 남매가 나에게 부담이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며 또한 일상의 큰 행복인 것처럼. 내가 손길을 내민, 내게 다가와 준 다른 동물들도 나에게 싸복이 남매와 마찬가지리라.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집에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것이 또한 행복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 길 위의 동물들과 '공존'하는 삶. 그냥,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그게 내 삶인 거다. 이러려고 '마당 있는 집'을 그렇게 꿈꾸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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