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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20. 2022

새벽 4시에 외국인 섭외해 보신 분

포기하지 않으면 우주가 돕는다


4주 남은 방송에 땜빵하러 갔다가

연장되면서 자리 잡았던 연애 프로그램

눈물나는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그 중 하나는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당시의 은인은 마치, 우주 어딘가에서 보내 준 것 같았다.


데이트 코너에서 다른 코너로 보내지면서

내게 주어진 일은 깜짝 카메라의  연기자 찾기였다.

처음엔 쉽겠구나 했다. 전문 단역 연기자 분들이 계시니까.

그런데 섭외가 쉬운 분들은 TV 노출이 많았고

깜짝 카메라가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연기자를 찾는 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졌다.

피디와 선배 작가가 원하는 조건은 이랬다.


1) 얼굴은 예쁘고 멋있어야함

2) TV에는 노출되지 않았어야함

3) 카메라 앞에서 떨지 말아야

4) 과장 연기가 자연스러워야 함

5) 비밀유지에 협조 가능한 인성

6) 출연료가 높지 않은 연기자


여기에 시청률이 높아지자 연기자 비중이 늘면서


6) 돌발상황에 대처 필요

7) 웃긴 애드리브


항목이 추가되었다. 진짜 수 없이 들이밀어봐도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퇴짜를 놓는

윗 분들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찾기란 

고난도의 미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섭외해야 하는 연기자는 별히

기본 일곱 가지 조건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


8) 발에 외국인, 20대 여자 연기자

9) 한국어와 외국어가 동시에 능통해야 함.


하면 된다. 하면 되지.

급하게 수소문을 시작했지만 계속 땡이었다.

한국어가 부자연스러워 땡. 얼굴이 더 예뻐야 돼. 땡

몸매가 부족해 땡. 너무 긴장해서 땡. 너무 나대서 땡..

그렇게 수도 없이 땡파티를 이어가다가

촬영 전날, 피디가 이렇게 말했다.


"촬영 엎어야 되니 이거?? 사람 못 찾아서 펑크 나면 니 탓이야.

 내일 아침까지 못 찾으면 촬영 접을 줄 알아."


지금도 의문이다. 어떻게 막내작가한테 저런 협박을 할까.

그리고 위에 선배는 왜 손을 놓고 있었지...?

촬영을 미루던 정리해 주었어야 맞지않나 싶은데.

실제로 내가 들은 말이 저거였다.


다음 날 오후 늦게 촬영이었는데 무슨 의도인지 취소는 하지 않고,

촬영 준비를 다 끝내 놓고서 저녁 무렵 피디도. 언니도 퇴근해버렸다.

나는 초조다. 회사에 혼자 남아 계속 전화를 돌렸지만

당장 내일이고, 조건도 어려우니 전화를 받는 곳 마다 다들 난색이었다.

열두시넘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촬영 엎어지면  내가 잘리는 걸까.

잠들지 못하고 계속 여기저기 검색을 하다가

외국인 에이전시 몇 군데를 더 찾아냈다.

새벽 2시 반. 미친 짓이지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 죄송해요. 급해서 그랬습니다..ㅠ"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는 나에게

그분은 화를 내지 않고 이야길 들으셨다.

여차저차 사정을 듣더니  어쩌냐며..

당장은 그런 사람이 는데 조건이 까다로워 찾기 어렵겠다고

알아보고 있으면 연락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감사를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분 말처럼 샅샅이 뒤진다 해도  밤중이다..

가능성 없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딱 한 군데만 더 전화를 해보고 포기하자 했는데

전화할 데 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떨리고 눈물 날 지경 되을 때

또 다른 외국인 에이전시 연락처를 하나 찾았다.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미친 짓 한 거, 욕하면 욕먹자.

안 받는게 당연하. 받아서 지금이 몇 시냐고 미쳤냐고.

화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맑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고 이어진 말이 충격이었다.


"아, ### 방송국 @@@작가님이죠?

 다른 업체 대표에게 전화받았어요.

 한국말할 줄 아는 외국인 연기자 찾는다면서요.

 딱하다고 같이 찾아봐주자고 해서

 이쪽 관계자들끼리 연락해서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봐요.  

 작가님, 그리고.. 일단 좀 자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

본 적도 없는, 오늘 알게 된 나를 도와주는 걸까.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몇 군데 인지도 모를 외국인 전문 업체들이

내게 필요한 사람을 찾아주려고 서로 연락하고 있다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가에 열이 올랐다.


고맙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분은 끝으로 나에게 "힘내세요"라고 말했고.

난 전화를 끊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새벽 다섯 시 반, 해가 뜨고 있었다.


결국은 한 숨도 못잤다.

두 세 시간 후 어느 이전시에서 메일을 보내왔고.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일찍 만났다.


17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이름.

러시아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방송 경험은 없지만 쾌활하고 예쁜 스물세 살 '옥산나'.

피디는 그녀를 보고 오케이 사인을 냈고

그 날 촬영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이후로 또 엄청난 상황들이 벌어졌지만...


가끔 생각한다.

쉽게 포기하지 않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앞으로도 끝까지 남은 힘을 짜내면

내가 모르는 어디선가,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 줄 거라고.

누구에게, 어디선가 들은 게 아니

내가 겪었으니 확실하다고.


진인사대천명은. 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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