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어릴 적 아끼던 옷과 모자가 기억난다. 파란색에 가슴팍에는 사자 한 마리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고 모자는 S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옷을 입을 때면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고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늘 학교를 등교하거나 밖에 나가 놀 때면 그 옷과 모자를 입고 나가곤 했다.
아버지는 25년간 S사에서 근무하셨다. 특히 S자동차에선 회사 창립 멤버셨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회사였기에 아버지의 회사가 곧 나의 회사인 것 마냥 자랑을 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크고 멋진 곳을 다니는 아버지가 어린 나에겐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부족함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까지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지금은 독립하여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다. 그럼 난 과거의 아버지만큼 멋지고 자랑할 만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 2달이 남았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보단 뭐라도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마침 아버지 회사에서 2달간 단기로 일하는 알바 자리가 생겼다. 그래서 제대를 하고 3일 뒤부터 출근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말이다. 내가 일 했던 파트는 자동차 엔진 헤드 조립이었다. 격주로 주야간 2교대로 일했다. 2시간 일하고 10분 쉬는 것을 아침부터 밤까지 했다. 계속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으니 이건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나인지 점점 혼돈이 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엔진파트의 보전 일을 하셨다. 기계가 고장 나면 고치러 오시는 엔지니어셨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일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지나가시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했다. 생각보다 일은 힘들었다. 처음엔 “군대도 다녀왔는데 못할 게 뭐 있어” 하는 심정이었다면 일을 한지 한 달 뒤에는 그냥 힘들었고 놀고 싶었다. 특히 야간에는 더 힘들었다. 낮과 밤이 바뀌는 일이 이렇게 몸을 고되게 하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10시간 동안 기계만 만지고 있는 일이 나에게는 정말 고역이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게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아버지께 2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릴 때 생각했던 그 멋있었던 S사는 온대 간데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간판만 볼 땐 그렇게 멋있었는데 막상 그곳에서 일을 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멋진 일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멋진 일이란 게 무엇인지 조차 몰랐던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뒤에 있던 S사라는 간판이 아니었을까.
우린 간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무슨 고등학교를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판단된다. 일단 실업계냐 인문계냐 그리고 이과냐 문과냐 이렇게 나뉜다. 흔히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쓸모없는 애들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난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못했으니까. 그래도 이름은 좀 있어 보였다. 국제금융고등학교 이름만 그렇지 그냥 상업고등학교였다. 그래도 학교에서 꾸준히 공부해서 나름 이름 있는 대학교를 갔다. 동국대학교 문제는 경주캠퍼스라는 거다. 항상 뭔가 하나씩 떨어지는 느낌은 그냥 기분 탓일까.
간판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에 이르게 되고 어디에 사는지도 중요하다. 특히 서울은 더더욱 그러하다.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주공아파트에 사느냐 메이커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며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나’라는 사람의 급이 정해진다. 마치 내신등급을 매기듯이, 마치 결혼정보 업체에 나를 매물로 내놨을 때 내 급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듯이 말이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간판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은행이라는 멋진 간판 아래 일하고 있는 지금, 사실 은행원들이 하는 일을 볼 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은행원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비스직의 끝판 왕이라고 보면 된다. 일단 큰돈을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고 은행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고객들은 최고의 서비스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래서 생각보다 고객들의 민원이 많고 심지어는 쌍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으니 생각만큼 고상한 일은 아니다. 은행원들도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실적 싸움이라 어떻게든 신용카드 하나, 보험 하나, 청약 하나 팔기 위해 영업을 해야 한다. 심지어 길에 나가 전단지를 돌리기도 한다. 그런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일이라는 게 멋진 일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만의 개인 작업실 하나 정도는 있을 거 같고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아 글을 쓰는 그런 상상을 하지만 그 유명한 유시민 작가도 자신의 개인 작업실을 가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매일같이 카페를 전전해야 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어려운 나 같은 사람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난 후에 남는 시간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렇듯 우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 밑에서는 끝없이 발을 구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해선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내 아버지도 그래 왔고 나도 그래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겉으로 보이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받아들이는 본인 스스로의 자세이지 않을까. 나 또한 처음 은행 경비원 일을 했을 때와 지금의 마음가짐은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그저 잠깐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적당히 했다면 지금은 이 또한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최대한 도움이 되고자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간판이 좋은 곳에서 일을 해도 마음이 지옥이면 더 이상 그 간판은 자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간판은 화려하지 않지만 스스로가 만족하고 마음이 평온하다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난 오늘도 멋있어 보이지 않은 일을 멋있게 하기 위해 출근한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짜 멋진 일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