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매일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가끔 파도처럼 감정의 쓰나미가 밀려올 때가 있다. 잔잔했던 바다가 일순간 파도에 뒤덮여 정신없이 바닷속을 헤집어 놓으면 다시 잔잔해 지기까지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매일 아침 똑같은 출근길에 아무 의미 없이 들여다보던 sns에는 항상 그렇듯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이는 사진뿐이다. 누군가는 평일인데 여행을 떠났고, 결혼을 하고, 연애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들 잘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웃긴 건 지하철 속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또한 출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깨닫지 못한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그렇게 불행해하면서도 sns를 끊지 못하고 계속 보던 중 한 피드에 눈길이 갔다. 그는 내가 여행을 다녔을 때 만났던 지인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책도 쓰고 강연도 엄청 많이 하고 방송에도 나오고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 자 이제 자존감이 또 떨어지려 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지금까지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마라톤으로 비유하면 이미 저 사람은 나보다 한참은 멀리 가 있는 듯했다. 왜 항상 나만 제자리걸음일까. 왜 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을까. 고작 은행 경비원이나 하자고 그렇게 여행을 다니고 대학을 나온 걸까. 앞으로 난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난 뭘 할 수 있을까. 등 이런저런 고민들과 풀리지 않는 걱정들을 가득 안은 채 출근을 하면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다운되어있다. 하루 전체를 풀이 죽은 듯 보내고 나면 뒤늦게 깨닫는다. 정말 쓸데없는 데 감정 낭비를 했구나 하고 말이다.
재미있게 본 예능 중에 “함께 걸을까”는 가수 GOD 멤버들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다. 오랜만에 함께 뭉쳐 시간을 보내는 멤버들 중에 유독 데니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 중 데니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약간 우리 멤버들보다 뒤처져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멤버들은 다들 자리를 잡고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자신만 유독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순례길 초반에 데니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항상 걱정 담당이었다. 늘 뒤처져서 팀원들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그랬던 그가 순례길 중반부터는 걱정을 버리고 팀원들과 즐겁게 걷는 모습을 보게 된다. 데니와 동갑내기 계상이 그런 데니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런 과정을 겪어 왔어. 나뿐만 아니라 쭈니 형도 호영이도 태우도 다 그래 다만, 데니 너는 현재 그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야.
그 과정이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어. 물론 짧으면 좋겠지만 길어진다면 걱정과 불안은 더 커지겠지만 그만큼 사람은 더욱 깊어지고 진해 질 거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 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를 하는 것 같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그 페이스를 잘 유지해야지만 끝까지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다. 옆에서 내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게 신경 쓰이겠지만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나의 페이스를 잘 유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결국 지쳐 쓰러지게 된다. 삶에서도 그렇다. 누구는 이런저런 성과를 내고 승진을 하고 이직에 성공하고 취직을 빨리 하고 결혼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 나도 빨리 저 사람처럼 뭔가를 이뤄내야만 할 것 같고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나도 그랬다. sns 속 타인들의 삶을 보며 나의 삶을 비교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깨달았다. 저 사람 또한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갔겠구나. 그리고 나 또한 내 길을 잃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잘 유지해서 가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니 과정이 좀 길어지더라도 괜찮겠다 싶었다.(물론 짧으면 좋겠지만..) 길어지는 만큼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것을 글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지고 진해진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 본다. 순례길 위 데니처럼 나도 인생길 위에 나를 위해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