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일간 좌충우돌 중남미 여행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거리에 노숙자에게 일용한 양식을 쥐어주고 노약자에게 자를 양보하는 것, 착한 일을 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사 준신다는 말에 철썩 같이 믿게 된다.
하지만 지금 여기 서울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괜히 도와줬다가 그 불똥이 나에게 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무시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버릴 때가 있다.
남보다 내가 더 중요하고, 타인의 불행과 나의 불행을 연결짓지 못하는 공감이 사라진 시대.
순수하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진걸까?
멕시코 시티에서 2주간 머물렀던 숙소는 "팬션 아미고" 하룻밤에 약 6,500원하는 굉장히 저렴한 숙소였다.
그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국인들도 저렴한 가격 탓이 많이 오는 편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친구 둘이서 여행하는 방원이 형과 민석이 형, 우루과이에서 인턴을 끝내고 홀로 여행하던 성훈이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을 썼던 기환이까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2주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한 분 있다.
그때는 아마도 멕시코에서 2주간의 생활을 거의 다 보내고 콜롬비아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며칠간 함께 지냈던 방원이형, 민석이형 그리고 성훈이를 다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았었다.
3인실이었던 내 방에 나이가 지긋이 든 어르신이 홀로 오셨다. 한국 분이셨고, 나와 같은 부산에서 이 곳 멕시코까지 오셨다고 했다. 언듯봐도 아버지와 동년배로 보였기에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쭤보니 원래는 와이프와 함께 멕시코와 쿠바를 여행하기로 했으나 아내분이 몸이 좋지 않아 혼자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배낭여행으로 다녀보신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멕시코 행도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이 먼 곳까지 오셨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저씨와 난 3일 간 함께 여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카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해 늘 돈이 없어 지지리궁상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쏠쏠하게 멕시코 시티는 잘 여행하고 다녀서 이젠 혼자 지하철도 잘 타고 이러저리 돌아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저씨는 시차 적응도 잘 안 되기도 했지만 가장 큰건 음식이었다. 멕시코 음식은 왠만하면 한국인에게 잘 맞는 편이었는데 뭔가 잘 안 맞으신지 잘 드시지 못하셨다. 그래서 난 멕시코 시티 시내에 있는 한국 식당을 투어 시켜 드리며 여기 저기 갈 만한 곳을 추려 가이드 아닌 가이드 역할까지 자처하게 되었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대신 밥이나 차비 등은 아저씨께서 내 주셨다. 그렇게 3일간 여행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아저씨는 사업을 하셨는데 이제는 주변에 다 물려주고여행을 자주 다닌다고 하셨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이렇게 있는데 뭐하는지는 지금 생각나지 않지만 뭔가 제 앞길은 다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여행해서 즐거웠고,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매일 아침도 함께 먹어서 나름 친해졌다.
나보다 족히 30살이나 많은 어른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건 상상해 보지 못했는데 이게 여행의 순기능인 것 같다. 모든 여행자는 나이, 신분 따위를 넘어 서로에게 모두 평등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아직 체크카드가 해결되지 못해 콜롬비아로 넘어가지 않고 멕시코에서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갈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에서 아웃 티켓을 끊어 놓았기에 안 타면 그 비용을 또 날리는 게 됐다.
너무 불안하고 또 무서웠던 난 콜롬비아라는 나라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이젠 걱정이 앞섰다.
과연 난 콜롬비아로 가서도 잘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멕시코를 떠나야 지금 처한 상황이 해결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예정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멕시코를 떠나 콜롬비아로 향하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는 날 아침, 짐을 챙기고 있던 나에게 아저씨께서 다가오셨다.
그리곤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뭐지?? 하고 손을 펴 보니 50달러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래서 난 극구 사양하며 다시 돌려드리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현금을 받는 건 좀 그랬다. 3일간 충분히 많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받아둬요. 내가 고마워서 그래요. 사정 다 아는데 그냥 보내는 게 마음이 쓰여서 말이지.
나도 오랫동안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고요. 그들에게 받았던 도움을 이제 내가 줄 차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꼭 받아줘요."
원래 여행자들끼리는 서로 평등하기에 이렇게 현금을 주는 일은 잘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말..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 나를 도와줬던 멕시코 친구 그도 그랬다.
나의 은인, 나의 구원자 멕시코 친구를 꼭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2주 동안 지내며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결국, 멕시코를 떠나는 날까지 그를 만나지 못해 실망감과 서운함과 약간의 미운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친구! 나 이제 멕시코 떠나.. 정말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못 봐서 너무너무 아쉽다. 솔직히 말해서 너가 나를 피하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맞아? 나에게 고마움을 표할 기회를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고, 잘 지내"
그 동안 문자를 보내면 답장 오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그런데 이때는 칼답을 보내왔다.
그가 말했다.
"amigo!(친구!) 맞아. 사실 너 연락을 피했어. 난 말이지 그냥 너를 돕고 싶었어. 너 사정 뻔히 아는데 자꾸 뭔가를 주려고 하니 조금 부담스럽더라. 난 그런 걸 바라고 도와준게 아니야!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기에 충분히 도울 수 있어서 도와줬던 거야! 그러니 정 그렇게 고마우면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 그럼 나도 만족할 것 같아!
잘 가 amigo mío coreano!"
그랬다. 전 날 저녁 멕시코 친구는 나에게 아저씨가 했던 말을 그대로 했던 것이다. 하루 사이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온 몸에서 전율이 흐르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멕시코 친구... 넌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란거니? 너희 부모님 누구시니? 진짜.... ㅠㅠ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난 멕시코 시티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타고 이륙하기 전까지 잠깐 잠에 들었다. 2주동안 멕시코에서 보낸던 시간들이 마치 꿈 같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막 이륙하려던 찰나 창밖으로론 붉은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간 쌓였던 마음 속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터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 힘들었고, 원망도 많이 했으며 짜증도 나고 답답하고 또 열 받는 일도 많았다. 욕도 많이했고 멕시코 사람들이 모두 싫었다. 그런데 반면에 또 너무 고마웠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들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즐거웠다. 매일 함께 옆에 지켜줬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소에는 몇 개월에 걸쳐서 느낄 감정들을 2주라는 짧은 시간에 다 느꼈기에 쌓였던 것들이 터져 버린 것 같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한 동안 난 엉엉 울었다.
그후…
콜롬비아 여행 3주 째 여긴 산티아고 데 칼리라는 곳이다. 멕시코를 떠나 콜롬비아까지 여행했고 이제 에콰도르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처음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거라 버스 시간까지 숙소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어떤 한 청년이 다급히 나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한다.
"친구 미안한데 내가 지금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하거든 그런데 지갑을 도둑맞았어.. 여자친구꺼까지 다 도둑맞아서 공항까지 갈 차비가 없는데... 정말 미안한데 내가 돈을 빌리진 못할 것 같아.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염치불구하고 돈있으면 나 주면 안 되겠니? 제발!"
난 이제 콜롬비아를 떠나려던 참이다. 버스 정류장도 걸어서 10분이라 돈 들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콜롬비아 돈을 그 친구에게 다 줬다. 그래봐야 몇 천 원 정도였다.
그리고 난 물었다.
"여기 있어. 나 이제 콜롬비아 떠나서 필요 없으니까 너 다 줄게 ㅎㅎ 그런데 넌 어느나라 사람이니?
"정말 고마워 친구 이 은혜 잊지 않을게!!! 나, 멕시코 사람이야!!"
순간 난 그 멕시코 친구와 아저씨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왔던 것이다. 그것도 멕시코 사람을 말이다!!
그제야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마음 속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했던 말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까?
어쩌면 인생을 산다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은 느낌이었다.
삶은 돌고 돈다. 결국 내가 한 행동과 말은 나에게 다시 돌아 오게 되어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깨닫게 되었다.
멕시코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