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 집에 올 때 내 잔소리는 폭발한다

by 조희진

나와 발터는 한국-독일 커플이다. 발터는 베를린에 살고 나는 포츠담에 산다. 베를린 남서쪽에 위치한 포츠담은 서베를린까지는 30분이면 가지만 발터가 살고 있는 남동쪽까지는 무려 한 시간 30분이 걸린다. 매일 오고 가기엔 기차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 비효율적이라 서로의 집에 한번 가면 적어도 2-3일은 지내게 된다. 각자 서로의 집은 장단점이 있는데 참으로 뚜렷하게 서로의 취향과 일치한다.


한적하게 조깅할 수 있는 숲이나 호수가 있고 조용한 위치, 겨울에 너무 춥지 않은 집. 내가 원하는 집이었다. 천장이 높아 분위기 있는 로맨틱함은 알트바우를 겪어보고 포기했다. 로맨틱 찾다 더 이상 난방비 폭탄이 두려워 추운 겨울을 나고 싶지 않았다. 보통 이런 조건의 집들은 대도시 한가운데에는 드물고 약간 외곽이나 작은 소도시일 확률이 높다. 포츠담은 베를린에서 아주 멀지도 않았고 한가하며 깨끗하고 사방천지 공원과 강물이 흐르는 이상적인 도시였다.


발터는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카페, 레스토랑, 친구들, 관공서, 사무실 등의 접근성이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고립됨'을 느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한 번은 집을 구하며 베를린 한가운데 알렉산더플라츠의 고층 아파트를 보러 갔었다고 한다. 교통의 요지였고 몇 없는 시내의 고층건물이라 베를린이 한눈에 담기는 뷰가 생각보다 꽤나 멋졌지만 그 집을 계약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내려다보면 길 위의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달리는 차량도 본인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듯이 보였다고 했다. 고층이 익숙하지 않은 독일인에겐 높은 위치마저도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런데, 내가 발터의 집에 갈 때보다 발터가 우리 집에 올 때 내 잔소리는 폭발한다. 기름을 쓰는 요리를 해도 발터의 주방에서의 나는 더 관대하다. 벽에 기름이 튀어도 바닥에 음식물이 흘러도 닦고 치우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인지 같은 상황인데 내 주방에서는 끊임없이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기름이 튈 테니 조심해서 저어라, 커피 그라인더는 쓰고 나면 꼭 선반 안에 다시 넣어놓아라, 쓰고 난 컵은 바로바로 싱크대에 갔다 놓아라, 쟈켓은 의자 위에 놓지 말고 옷걸이에 걸어라 등등. 사실 모든 행동을 나는 발터의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발터는 아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쏟아지는 내 잔소리를 묵묵히 듣는다.


연애 초반 주로 발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내가 엄청나게 쿨한 성격의 여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잔소리도 없고 크게 까탈을 부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랬던 이유는 하나이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희한하게 내 주방에는 그렇게 잘 보이던 벽의 기름자국이 발터주방에 있으면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내가 닦아야 할 것도 아니고 내 공간도 아니라 그런가. 발터의 공간에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내가 필요한 것만 챙기고 뒷일은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 생긴다. 좋게 말하면 내려놓음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한 그런 태도랄까.


요 며칠 둘 다 감기로 앓아누우며 더 따뜻한 우리 집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5일쯤 지나니 나는 잔소리 대마왕이 되어있었고 급기야 곳곳에 포스트잍으로 '화장실 불 끄기', '커피 그라인더 제자리 놓기' 등을 붙이는 지경까지 갔다. 열이 오르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라 곱게 말하기도 힘든데 잔소리까지 하자니 마찬가지로 아픈 발터는 그거 듣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침부터 굿모닝을 말하기 전 빈 화장실에 켜진 불을 지적하는 나에게 나 스스로 놀라고 질렸다. 갑자기 미안했다. 그렇지만 마음만큼 태도가 빠르게 변하진 않는 고집불통이라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오늘 오후는 친절하게 대해줘야지.





연재 브런치북에 최대 30개의 글만 올릴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갑작스레 [베를린 에세이 2]라는 새 브런치북을 만들었어요. [베를린 에세이 1]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독일에서의 소소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9화내 남자친구 발터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