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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 발터를 소개합니다

by 조희진

며칠째 나도 발터도 지독하게 앓고 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병이 날 것 같아하는 그도 바이러스 가득한 몸뚱이를 하고서는 조용하다. 딱히 난방을 하지 않아도 겨울이 따뜻한 복 받은 우리 집은 아플 때일수록 빛을 발한다. 포츠담에 있는 집은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좋지만 그가 사는 베를린의 힙한 동네처럼 카페, 바, 레스토랑 등은 드물다. 그런 이유로 발터는 포츠담으로 오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와서도 오래 머물지 않지만 아프니 이만한 집이 없다며 감사하고 있다. 발터의 집은 전형적인 천장 높은 베를린 알트바우라 한겨울에는 코끝도 시리고 발도 시린 집이다.


약 60 제곱미터의 침실 하나 거실 하나 있는 집에서 둘이 지내려면 완전히 서로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거실의 테이블이 6명까지 앉을 수 있는 크기라는 것과 1인용 소파가 거실 구석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정도이다. 테이블에는 두 명이 각자의 노트북을 놓고 앉을 수 있으며 필요할 때는 몇 미터 떨어진 1인용 소파에서 나름 거리를 둘 수 있다.


발터는 아프지만 특별히 병가를 내지 않았다. 보통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쉬지 않고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쓴다. 거래처 사람과 현재 상황을 주고받고 동료 직원과 미팅을 하는 등 옆에 앉아있으면 그의 상황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다. 반대로 나는 주로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작업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이번 달 초까지 보내야 하는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갤러리 측에 메일을 써서 자료를 요청하고 웹서핑을 통해 작가의 이력을 조사하는 등 조용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매일 브런치에 올라갈 글을 하나씩을 쓰고. 그러니 발터는 궁금한가 보다 내가 무엇을 쓰는지. 안타깝게도 본인은 읽을 수 없는 한글로만 쓰여있으니 보여줘도 볼 수 없고 온전히 내 설명에만 의지해야 하는데 나도 딱히 나의 브런치 글에 대해는 간단히 '독일에 사는 이야기야'라고만 답한다.


"가끔 발터 얘기도 써"

내 말에 귀가 쫑긋한다. 사실 발터 얘기를 집중적으로 쓴 적은 없다. 본인의 얼굴이 노출된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에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반기는 내색이 보였다. 단, 본인의 실명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해 달라는 귀여운 부탁과 함께. 본인에 대한 에피소드도 쓴다는 빈말로 던진 내 말에 반가워하는 것을 보니 혹시라 나중에라도 읽게 되었을 때 자기 얘기가 없다는 것을 알면 섭섭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쓸데없는 기우이긴 하지만. 지금도 마주 앉아 내 노트북 위에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모니터를 거꾸로 본다. 원하는 게 뭐냐는 내 질문에 이 글을 읽고 싶다고 한다. 잠깐의 장난을 웃고 넘기며 다시 각자의 일을 한다.


나는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밥도 먹고 일도 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반드시 나만 오롯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내가 변했다기보다는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포기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해야 할까. '나만의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 비단 나뿐일까?'싶었고 발터도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혹은 나보다 더 본인의 울타리가 중요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서로가 혼자 있고 싶을 타이밍이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한쪽은 같이 있고 싶고, 다른 한쪽은 혼자 있고 싶을 때 있지 않겠는가. 나이 먹고 연애하는 우리는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기도 하면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불편해도 같이 하는 것, 아쉬워도 혼자 잘 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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