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얼굴보고 마주앉으면 무슨얘기라도 실컷 할 수 있을것 같은데
해가 가장 짧다는 12월 21일까지 약 열흘정도 남았다. 열흘이 지나면 해가 다시 길어지겠지.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아침에 눈을 떠도 깜깜하고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밤이 되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약 6시간의 밝은 시간이 생각처럼 밝지도 않다. 머리 바로 위로 두껍게 구름이 가득하고 아침부터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풍경을 바라본다. 차라리 한국처럼 매우 추운 날이면 좋겠다. 기온이 0도나 영하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의 구름이 덜하다. 한국의 겨울처럼 바람은 차갑지만 해가 나고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주는 12월이지만 낮 기온이 12도를 웃도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날들이었고 날이 따뜻하니 구름이 다 녹아내리는지 회색비가 내린다.
무릎이 아픈지도 오래되었고 병원 예약은 이래저래 미뤄져 3개월 동안 띄엄띄엄 진료를 보고 있다. 덕분에 아침에 눈뜨면 뛰러 나가는 애정하는 내 취미는 자주 못 뛰니 이제 취미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축축하고 우중충한 날씨에 아침부터 초를 켜고 집에만 있으니 청승이 가득하다. 운동량도 줄어들어 몸을 안 움직이니 기분도 바닥으로 고꾸라져 박히는 기분이다. 열 번이 넘는 베를린의 겨울을 겪었다. 내년 겨울은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순진한 기대를 하는 초보도 아니다. 그저 버텨야 하는 이 몸과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계절을 통과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지만 큰 차도는 없다. 그래도 딱 하나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몸을 움직이는 것.
얼반 스포츠(Urban Sports Club)를 끊었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회사의 복지 중 하나로 회원권이 있었는데 퇴사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스포츠 및 웰니스 구독형 멤버십 서비스로 베를린뿐 아니라 독일 전역, 타 유럽국가까지 이 서비스에 등록된 스포츠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의무계약기간을 한 달, 1년, 2년으로 선택할 수 있고 의무계약기간이 길수록 월별 내는 비용은 조금씩 줄어든다. 어찌 되었든 당장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왕 운동하는 거 꾸준히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마음이 더해져 2년 의무 회원권을 선뜻 가입했다. 이 회원권은 대도시일수록 유용하다. 베를린처럼 큰 도시에는 다양한 스포츠센터가 있고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
여러 카테고리를 검색하다가 발레수업을 찾았다. 두 번 정도 시도했었으나 매번 한 달 이상을 못 가고 포기했던 발레. 요가도 오래 했고 수영도 즐겨하는 나에게 천천히 자세를 교정하며 배우는 춤이라 맞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내 다리는 외형에 비해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고 너무 초보가 재미를 붙이기에는 꽤나 시간이 걸리는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한구석에는 한번 더 시도해 보고 꼭 몇 개월을 버텨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게 지금이었다. 단, 내 무릎이 생각났다. 무릎은 살짝 아플 때 무리하지 않고 잘 회복해야지 다시 오래 잘 쓸 수 있다기에 조심하고 있는 요즘 발레는 해도 괜찮은 걸까?
발레를 오래 하는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당장 메시지를 보냈다.
"뭐 해, 발레 중?"
"응, 발레"
한국시간으로 늦은 저녁이었는데 역시나 친구는 춤을 추고 있었다. 하루에 최소 3시간은 발레를 한다는 친구는 아마추어대회에 나가 상을 받을 정도로 프로 발레리나에 버금간다.
발레 중이라는 짧은 답에 뒤이어 친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일인데?"
"그냥, 독일은 지금 마냥 깜깜해."
"왜 왜 무슨 일이야-?"
나는 발레를 잘 아는 친구에게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는 운동인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인데 사실은 아니었나 보다. 무슨 일이냐는 메시지에 갑자기 울컥함이 밀려왔다. 따뜻한 얼굴보고 마주앉으면 무슨얘기라도 실컷 할 수 있을것 같은데 마주앉을 수가 없다. 딱히 무슨 일이 없으니 아무 일도 없다는 내 답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여기 겨울이야."
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혼자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한국에서 베를린으로 다음 주쯤 와서 2주 정도 후에 돌아가는 일정으로. 워낙 바쁜 친구라 시간이 비어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프리랜서니 연말은 좀 한가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간만 된다면 비행기 티켓정도는 내가 선물로 초대하고 싶었다. 친구가 시간만 내준다면야 내가 부자는 아니어도 몇백 유로는 아깝지 않다. 나와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겨울을 같이 경험해 준다면 감사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나 혼자 하는 상상이고 기대고 계획이었다. 역시나 아쉽지만 베를린에 올 수 있는 시간은 어렵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해가 짧아지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면 이성이 조금 무너진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결정을 하고 물건을 사고 와인을 마신다. 연말의 축제분위기도 더해 어찌어찌 이렇게 시간이 가고 새해가 온다. 갑작스럽게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하고 신년계획을 세우며 마음을 다잡겠지. 아직 한창 진행 중인 이 혹독한 베를린의 겨울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