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30분의 시간

나는 성취에서 오는 팡팡 터지는 도파민에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by 조희진

사과, 바나나, 요거트, 치즈, 계란. 슈퍼마켓에 가면 늘 사는 기본 품목이다. 예전에 동생이 놀러 와서는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었다. 과일 종류가 이렇게 많은데 매번 사는 게 고작 한국에서도 지겹도록 먹는 사과랑 바나나냐고. 다행히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과일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사과이다. 덕분에 여행을 가도 호텔 근처 슈퍼마켓에서 사과 몇 알 사놓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특별한 조식이 없어도 사과 한 알이면 충분히 괜찮은 것이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독일은 행복한 나라이다. 온갖 종류의 사과를 계절별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사과와 바나나를 잘게 썰어 넣고 뮤즐리에 요구르트와 우유를 반반 섞어 아침식사를 만든다. 뜨거운 차를 옆에 두고 먹는 차가운 아침식사. 매일 같이 몇 년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아하지만 겨울에는 좀 다르다. 약간은 서늘한 기운이 도는 날은 따뜻한 음식을 아침식사를 하고 싶지만 마땅한 메뉴를 고르기 어렵다. 아침부터 팬케이크를 굽거나 수프를 끓일 부지런함은 없으니 따뜻하지는 않아도 매우 차갑지 않은 차선을 택한다. 독일식 빵과 치즈. 추우니 따뜻한 차 한잔과 커피 한잔, 두 잔의 뜨거운 마실거리가 옆에 있다.


큰 변화 없이 어느 정도 하루의 순서가 정해져 있는 삶을 추구해 왔다. 일어나서 해야 할 다음 순서가 차례로 정해져 있는 하루는 심리적으로 나를 안정시켜 준다. 그런데 가끔은 매일 해오는 별거 아닌 일과도 버거울 만큼 무기력이 몰아칠 때가 있다. 내 상태가 괜찮은 날은 눈뜨면 무선청소기로 집을 한 바퀴 청소한다. 길어봤자 15분의 시간이다. 청소를 하며 주방을 지날 때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 전원을 눌러놓으면 청소가 끝나고 팔팔 끓여져 있는 물로 찻주전자 한가득 차를 끓인다. 빈속에 차를 두 잔 정도 마시고 요가매트를 깔고 잠깐의 스트레칭을 한다. 이 또한 게으름 부리지 않으면 5분에 끝나는 스트레칭이지만 요가매트 위에 가만히 앉아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면 스트레칭이 20분이 넘어가기도 한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의 이 30분의 과정이 생략되느냐 지켜지느냐가 그 하루의 컨디션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은 한 번도 스트레칭을 하지 않았다. 청소기는 겨우 두어 번 돌렸으나 말 그대로 '겨우' 돌렸다. 왜인지 가볍게 시작되었던 위경련이 잔잔히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이틀정도는 찐 브로콜리와 호박만 먹었다. 한심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날이 어디 하루이틀이랴.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번엔 또 무엇이 트리거가 되어 이렇게 가라앉기 시작했는지. 인간이 그래도 하루하루 나아지려면 이미 경험했던 실수에서 배우는 것이 하나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예상했던 보상이 없음에 오는 허탈함과 낮아진 자신감. 한동안 나름 꾸준히 한다고 자부심을 느꼈던 것, 스스로 시도해 보는 것이 이쯤이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아무 주변의 반응이나 보상이 없으니 나 혼자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이유로 내가 무너진 것일까 생각했더니 기운 빠진 웃음이 났다. 너무 보잘것없을 만큼 시도해 놓고 거기에 보상이 없다고 바닥으로 내쳐지는 나 자신이 참으로 못났더라. 나는 성취에서 오는 팡팡 터지는 도파민에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또다시 이렇게 무너지는 날이 오겠지. 그때는 지금 보다 조금 더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다면 이 무기력했던 한 주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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