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문구류를 잘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서정리에 진심인 사람들

by 조희진

어제는 집에 가득 있는 파일 정리를 했다. 한국에 살았다면 해볼 일 없을 문서 정리라고 해야 할까. 모든 사무가 종이에 쓰인 서류로 완성되는 독일이다. 개개인마다 서류를 묶어두는 두꺼운 파일이 작게는 서너 개에서 많으면 수십 개까지 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온라인가입을 하려면 편지로 신청하라는 말도 있다. 완전히 농담은 아닌 것이 은행이나 관공서 웹사이트 등의 온라인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홈페이지를 통해 가입하되 비밀 번호는 약 2-3주 후에 우편으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월세 계약서, 근로 계약서, 보험 가입 계약서 등의 모든 서명이 들어간 서류는 기본이고 관련 편지도 두고두고 보관해야 한다.


서명이 없는 편지도 중요하다. 월세인 경우 집 관련 유틸리티 비용에 대한 내용등이 적힌 편지, 세무서나 연금기관에서 오는 편지는 날짜와 받는 이름을 확인하고 차곡차곡 파일에 정리해 놓는다. 최소 10년은 보관해야 한다. 나중에라도 뜬금없이 변호사나 기관에서 골치 아픈 편지가 날아올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한 추가 비용이 가장 흔한 경우이다. 이미 이사를 떠나온 옛 집에서의 비용청구라던가, 프리랜서나 사업자라면 이미 다 냈다고 생각했던 소득세 등의 세금이 잘못된 계산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런 억울한 경우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려면 몇 년 전에 받았던 편지를 증거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독일은 개개인이 모두 어드민이다. 각자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볼 줄 알아야 살아가는데 손해가 덜하다. 개인이 이러하니 회사 행정팀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은 동료 중에 파일정리를 칼각으로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대충 구멍 뚫어 파일에서 빠져나오지만 않게 하는 나로서는 신기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 동료는 0.5센티도 흐트러짐 없는 자신의 파일이 꽤나 흡족한 듯했다. 한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독일 사람들의 '파일 정리 페티시'란 단어가 생각나면서 묘하게 웃음이 났다. 이러한 사람들이니 문구류 개발에 진심이었겠지. 노트와 펜은 기본이고 클립, 파일 챕터 사이사이 끼워 넣는 작은 파티션 종이(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칼과 가위 등은 정말 대충 사도 놀라운 품질이다.


정리 못하는 나도 독일에서 살아야 하니 그나마 평균치로 끓어 올려진 것 같다. 10년 전의 파일을 싹 버리고 지난 10년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듬성듬성 빠진 부분이 꽤 있긴 해도 나름 잘 모아놓긴 했다. 독일어도 모르는 초반에는 법적 내용 가득 써인 편지들은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파일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버려야 할 파일에 광고 편지도 있고 기본 안내서도 꽤 있어서 웃음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근근이 집을 찾아 내 이름으로 월세 계약서도 쓰고 근로 계약서도 쓰고 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용했다. 덕분에 손해도 종종 보긴했지만 말이지.


앞으로 10년 후에도 이만큼의 서류가 있을까? 매우 매우 느리지만 독일도 나름 전자화를 하겠다고 움직임을 보인다. AI로 대체되어 일자리가 많이 줄어들 거란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가끔 보이는 일자리가 있다. 지금까지 있는 모든 종이 서류를 디지털화하기 위해 입력해야 하는 업무이다. 과연, 나 때에는 온라인 비밀번호를 편지로 받았었다고 웃으면서 얘기하는 그날이 독일에도 오긴 오겠지?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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